몸튼튼 마음튼튼

바보 노아 바보 예수 바보들

하나님보리 2016. 10. 20. 08:38


바보 노아, 바보예수, 그리고 바보들.hwp

바보 노아, 바보 예수, 그리고 바보들

 

창세기 6:8-22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3)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바보 : 밥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밥만 축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제가 좀 바보스럽긴 한데, 우리 나라에 바보로 불리우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바보 김수환, 바보 장기려, 바보 노무현, 바보 이석태,

저는 성경에서 바보를 찾아보며, 첫 번째 바보가 노아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 ‘위안또는 휴식’ ‘안식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종호님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은혜라는 고백이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도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만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도 잘 알고 계시지만 다시 한번 상기를 해보겠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천년 가까이 살았고, 노아가 구백오십세(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살았다는 이야기)에 죽었고 이후로는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세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창세기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누가복음 1727절에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 37- 3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홍수를 맞기까지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걱정이 없었고, 당연히 노아의 경고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 가고, 죽을 걱정도 없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인 하나만 있어도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 말고 다른 의인 하나만 더 있었다면 아마도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노아는 100년 내지 120년 동안 가족노동으로 방주를 만들었으니, 누군가는 왜 방주를 만드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전해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고, 실컷 즐기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 시대의 사람들 눈에 보인 노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천국같은 곳에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것을 하나 하나 만들어가는 노아를 바라보는 그 들의 비웃음이 지금 당장 제 귀에 들려오는 듯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시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방주를 만듬으로 인해 인류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 가족을 통해 온 지구상의 사람들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노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노아 못지 않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무모하게 홍해를 건넌 모세,

다니엘과 세친구, 3년 동안을 벌거벗고 세상을 살아간 이사야선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세상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뭐라 말했을까요.

 

최초의 인간 아담, 2의 조상 노아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또다른 바보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른만 5천명을 먹이시고,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000명을 먹이시고, 죽은자를 살리시고, 눈먼자를 보게 하시고, 벙어리를 고쳐주시고, 온갖 귀신들린자들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칼에 잘린 귀마저 붙여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던가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열린가정교회에 오셔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신다면, 이곳은 아마도 세계적인 성지가 되고, 대한민국은 그로 인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척박한 땅 이스라엘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시며,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아마도 입히셨을 것이며,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권력자, 갖은 자들의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그 시대의 잘못된 관행을 과감하게 무너뜨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그 분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으며, 사흘동안 죽음의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그 길이 너무나 힘든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시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바보가 되어 골고다의 고난길을 가셨고 예정대로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승천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그렇게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그 길을 예수님은 뚜벅 뚜벅 걸으셨고, 이는 바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죽는데 까지 허락하시어 이 영광의 자리를 얻게 하시고 위대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하는 감사와 찬양의 소리라고 말씀하신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세상을 바보처럼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보 이반을 쓴 톨스토이를 대부분 다 아실 것입니다.

농노의 해방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도 바보예수의 삶으로 살으신 분이 계십니다.

 

도암의 성자라 불리우는 이세종선생님은 예수를 믿고 난 후, 고리대금업자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겨온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빚문서를 태워버렸고, 재산을 팔아 걸인과 빈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이세종은 그 뒤 빌공()자를 써서 스스로를 이공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철저히 부인한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재산욕, 명예욕은 물론 식욕, 색욕, 수면욕도 철저히 극복해 초월했다. 그때부터 아내를 누이로 대했고, 죽는 순간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몸으로서 인도의 간디보다 앞선 금욕의 선언이었고, 그보다 더욱더 철저히 이를 지켰습니다.

심지어 16살이나 어려 젊은 아내가 여전히 젊은 욕정을 참다 참다못해 새서방을 얻어 집을 나가자, 아내의 짐을 지게에 져 날라다주었고, 틈나는 대로 찾아가 살다 살다 못 살면 언제든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아내는 돌아왔으나 다시 다른 서방을 얻어 떠나갔습니다. 수년 뒤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는 깊은산 화학산 외진 산골에서 걸인처럼 살던 이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공이 죽자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3년간 시묘살이까지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프린치스코라 불리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은 이세종선생의 제자로 스승에 못지 않은 삶을 살아고, 동광원을 통해 새마을 운동의 기초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또 다른 맨발의 성자 최춘선목사님 -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고아원을 세워 자식들의 똑같이 키우셨다고 하지요.

 

장기려 박사님. 장기려 박사는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의사들의 호화스런 대우에 비해서는 그분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고 합니다.

병원비를 낼 수없는 환자를 자신이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 놓아 도망가게 하는 장 박사님은 분명이 바보의사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졌습니다. 이광수는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당신은 성자(聖者)아니면 바보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의 바보목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감리교 목사인 만득이라 불리는 전생수 목사님이라시는데, 전 인터넷을 통해 보았을 뿐이고, 인터넷에 올려진 유언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땅에 '아무개'라는 이름을 달고 산 지 쉰 한 해 되는 봄. 예수의 도에 입문한 지 스물여덟 번째 되는 해에 유서를 쓰노라. 나는 스물 셋 되던 해에 예수의 도에 입문하여 늦은 나이에 학문을 접하며 좋은 스승들을 만났고 좋은 길벗들을 만나 여기까지 살게 된 것에 감사하노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에 남은 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노니,

 

첫째,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인즉,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지 말라.

 

둘째, 나는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어떤 음식이든 먹지 않을 것인즉 억지로 권하지 말라. 또한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꺼려하지 말라.

 

셋째, 내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려 장례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넷째, 내가 죽으면 내 몸의 쓸모 있는 것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내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던 옷을 입혀 화장을 하고,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향 마을에 뿌려 주기를 바란다.

 

다섯째, 내가 죽은 뒤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푯말이나 비석 따위조차도) 와서 산만큼 신세를 졌는데 더 무슨 폐를 끼칠 까닭이 없도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

 

예수의 도에 입문한지 스물여덟 번째 되는 해 봄 2004225일 사순절 첫 날에

虛耳(만득이) 전생수 씀.

목사님의 유언대로 그의 각막과 신장, 간장, 심판막 연골 등 장기는 모두 7명의 환자들에게 기증됐다고 합니다.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바보목사의 삶을 살며 한때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평생을 무소유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인이 남긴 재산은 10만원도 채 안됐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바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을 줄 알며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사람들

갖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사람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뱀처럼 지혜롭게 판단하시길 기원합니다.

 

his will 나도 바보처럼 살래요 (찬양입니다)

 

산 위에서 세상모르고 배만 만드는 노아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 같군요

왜 맑은 날 배를 만드나요 왜 하필 높은 산위에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 같군요

 

눈부신 해가 하늘 높이 뜨면 비의 약속 잊을만한데

날마다 듣는 조롱에 그 외로운 길 포기 할 만한데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눈부신 해가 하늘 높이 뜨면 비의 약속 잊을만한데

날마다 듣는 조롱에 그 외로운 길 포기 할 만한데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묵묵히 그 길 가나요

당신은 어쩜 그리 그 자리를 지켜냈나요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당신 정말 바보 같군요

당신 참 바보 같군요 나도 바보처럼 살래요

누가 바보일까요....

어느 마을에 바보 소리를 듣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바보라고 불리는 아이를 놀리기 위해서 50원짜리 동전과 100원짜리 동전을 놓고서 마음대로 집어 가라고 하면

이 아이는 항상 50원짜리 동전만을 집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은 어떤 동전이 더 좋은 것인 줄도 모른다면서 이 아이를 놀려 댔지요.

이런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동네의 어떤 어른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얘야! 50원짜리보다 100원짜리가 더 큰 돈이란다.

100원짜리로 더 좋은 것을 살 수가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100원짜리 동전을 집으렴

이 말에 아이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 저도 알죠.

하지만 제가 100원짜리를 집으면 동네 아이들이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저는 돈을 벌지 못하잖아요.”

어떻습니까?

누가 바보일까요?

바보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어쩌면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만큼은 바보처럼 살아보면 어떨까요.

바보

내가

바보가 되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는다

지보다

못한 놈이라고

뽐내면서 말이다

내가

바보가 되면

마음씨 착한

친구가 모인다

불쌍한 친구를

돕기 위해서..

내가

바보가 되면

약삭빠른 친구는

다 떠난다

도움받을

가치가 없다고..

내가

바보가 되면

정말 바보는

다 떠나고

진정한 친구만

남는다

내가

바보가 되면

세상이

천국으로 보인다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까..

- 톨스토이 원작 <바보 이반>

바보이반

 

옛날 어느 나라에,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 농부에게는 세 아들과 말 못하는 딸이 있었다.

큰아들 시몬은 군인이었다. 난 용감히 싸울 거야.

둘째 아들 뚱뚱보 타라스는 장사꾼이었다. 난 돈을 많이 벌어야지.

셋째 아들 이반은 농사꾼이었지만 좀 모자라는 바보였다.

큰아들 시몬은 전쟁터에 자주 나갔고, 둘째 아들 타라스는 돈 버는 방법을 배우러 장사꾼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늘 셋째 아들 바보 이반이 남았습니다. 바보 이반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모와 누이를 모셨습니다.

큰아들 시몬은 귀족이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시몬은 돈을 잘 벌었지만 늘 쪼들렸습니다.

아니, 돈이 다 어디로 갔지?

시몬이 묻자, 사치한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다 썼지요, .

돈이 없으니 아버지께 가 봐야겠어.

큰아들 시몬이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아버지, 제게 땅을 나눠 주십시오.

땅은 모두 이반이 일해서 샀다. 그 애에게 물어 봐야 돼.

아버지는 이반에게 말했습니다.

네 형이 땅을 달란다.

그러지요.

이반은 선뜻 허락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타라스는 장사꾼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타라스는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재산이 더 있었으면 좋겠단 말야. 어디 아버지께 가서 졸라 봐야지.

타라스는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제게 재산을 나눠 주십시오.

무슨 재산을 나눠 달라는 얘기냐.

우리 집의 재산은 모두 이반이 일해서 모은 것이다. 그러니 이반에게 물어 봐야 돼.

아버지는 이반의 뜻을 조심스레 물어 보았습니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형 타라스에게 재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이반네 형제들은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반이 형들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늙은 악마는 이반 형제가 의좋게 지내가 몹시 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새끼 악마 셋을 불러 말했습니다.

저 이반 형제들이 서로 미워하도록 만들자.

도대체 저놈들은 싸우질 않으니 속상해 죽겠다.

새끼악마들이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거 재밌는 일이군요. 우리가 맡아 삼형제가 서로 싸우게 만들지요.

세 새끼악마는 큰아들 시몬, 둘째 아들 타라스, 셋째 아들 이반을 각각 맡았습니다.

잘 해 보자고, 히히히.

첫째 악마가 큰아들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 시몬님, 시몬님은 용감하시니까 누구든지 무찌를 수 있을 거예요.

첫째 악마는 시몬의 허영심을 복돋웠습니다.

시몬은 허영심에 들떠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

임금님, 제가 이 세상을 모조리 정복하겠습니다. 먼저 인도를 치겠습니다.

시몬은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첫째 악마는 시몬의 군대를 찾아가, 화약을 물에 적셔 놓았습니다. 물에 젖은 화약총을 들고 시몬의 군대는 인도 군대와 싸웠으나 결국 첫싸움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악마는 둘째 아들 타라스를 만났습니다.

타라스님, 정말 부자시군요. 그런데 없는 물건도 있네요.

둘째 악마는 타라스에게 욕심을 잔뜩 불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타라스는 보는 물건마다 탐을 냈습니다.

이런, 사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모자라네.

타라스는 빚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빚은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악마는 요술을 부려 타라스의 물건을 죄다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빚을 갚을 날이 곧 돌아오는데.

결국 타라스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도망쳤습니다.

셋째 악마는 바보 이반에게로 갔습니다.

악마는 이반이 먹을 음식에 병균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반의 땅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저 녀석이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악마는 이반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반은 배가 아팠습니다. 병균이 든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살 부리지 않았습니다.

어서 땅을 갈아야지.

이반은 아픈 배를 잡고 단단하게 굳은 땅을 갈았습니다.

, 땅이 굳었잖아.

이반은 더욱 힘을 썼습니다. 셋째 악마는 이반이 속아 넘어가지 않자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반이 땅을 가는 데 쓰는 쟁이에 매달렸습니다. 일을 못 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이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런 못된 놈이 있나.

이반은 화가 나서 단번에 악마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때 악마가 말했습니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그러면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신기한 약초를 드릴게요.

이반은 약초를 받았습니다.

큰아들 시몬과 둘째 아들 타라스를 골탕먹인 두 악마는 이반에게 갔습니다.

이반 녀석, 우리가 힘을 모아 곯려 주자.

첫째 악마가 이반의 밭으로 가 일을 훼방 놓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쇠스랑에 걸려들었습니다. 또 둘째 악마는, 이반이 쓰러뜨린 커다란 나무의 가지에 걸려 버둥댔습니다.

두 악마의 꼴이 처량했습니다.

옳아, 두 악마가 더 있었군.

이반은 두 악마를 한꺼번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첫째 악마가 말했습니다.

제가 짚 다발로 군인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첫째 악마는 짚으로 군인을 만들었습니다.

둘째 악마가 말했습니다.

제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나뭇잎으로 돈 만드는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둘째 악마는 나뭇잎을 손으로 비볐습니다. 그러자 나뭇잎은 모두 돈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반은 군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반은 큰형 시몬을 위해 군인을 만들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반은 짚으로 많은 군인을 만들었습니다. 시몬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시몬은 그 군인들을 이끌고 싸워 나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반은 둘째 형 타라스에게 줄 돈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타라스 앞에 돈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타라스는 그 돈으로 다른 나라를 몽땅 사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반이 사는 나라의 궁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공주가 몹쓸 병에 걸린 것입니다. 왕은 온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내 딸의 병을 낫게 해 준 자에게는 왕 자리를 물려주겠소.

이반도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 내게 신기한 약초가 있으니 공주를 살릴 수 있겠군.

이반은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제가 공주님의 병을 고치겠습니다. 이 약초를 드십시오.

공주는 약초를 먹은 즉시 기운을 되찾았습니다. 이반은 공주와 결혼하였습니다. 왕의 자리도 물려받았습니다.

저런,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예쁜 왕비도 얻고 왕도 됐네.

사람들은 이반이 왕이 되었다는 소리에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잘못 전해진 게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반은 왕이 된 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왕 옷은 너무나 거추장스러워. 난 일하기에 편한 옷을 입겠어.

이반은 옛날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왕비도 그를 따라 조용히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새끼악마들이 실패한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좋아,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서야지.

늙은 악마는 장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시몬에게 갔습니다.

시몬님, 나라의 땅을 더 넓히기 위해서는 전쟁을 일으켜야 합니다. 어서 싸우세요!

그 말을 들은 시몬은 용기를 얻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상대방 군대가 시몬의 속셈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공중에 폭탄을 터뜨려, 시몬 군대를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시몬을 망하게 한 늙은 악마는 신이 났습니다.

늙은 악마는 상인으로 변장하여 타라스의 나라로 갔습니다.

어떤 물건을 가져오더라도 내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이겠소.

악마는 사람들의 물건을 비싼 값에 샀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이 생기자, 타라스에게 세금을 많이 냈습니다. 타라스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돈이 많이 들어오는구나. 뭘 좀 사 볼까?

타라스가 물건을 사려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라스에게 팔지 않고,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타라스는 돈이 있어도 물건을 못 사 굶주렸습니다. 두 형제를 멋지게 해치운 늙은 악마는 이반의 나라로 갔습니다.

이반님, 아무래도 나라를 지키려면 군인이 필요합니다. 군인을 모집하십시오.

그래, 그럼 네가 모집해 봐.

이반은 군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군인을 모집합니다. 되고자 하시는 분에게 술과 좋은 옷을 드리겠습니다.

술과 옷은 필요 없어. 술은 얼마든지 있고 옷도 필요하면 내가 만들어 입으면 되지.

스스로 일해서 먹을 것을 버는 사람들은 묵묵히 일할 뿐이었습니다. 늙은 악마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의 이끌고 와서 이반의 나라를 쳤습니다. 그러나 이반 나라의 백성들은 쳐들어온 군인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이걸 좀 드십시오. 우리가 만든 음식이랍니다.

군인들은 놀랐습니다.

아니, 우리는 싸우려고 왔단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상냥하게 대하면 어쩌란 말이오.

싸울 게 뭐 있나요. 필요하시면 이 물건들을 다 가지세요, 또 만들지요.

, 재미없어.

군인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자, 늙은 악마는 다시 이반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벙어리 누이가 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늙은 악마는 식탁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사람의 손만 보고도 게으름뱅이인지 아닌지를 분간해 냈기 때문에 굳은살 없고 깨끗하여 매끈한데다가 손톱도 길게 자라 있는 늙은 악마의 손을 보고는 음식을 줄 수 없다며 쫓아낸 것입니다.

이반님, 왜 이 나라 백성들은 머리를 쓰지 않고 손으로만 일하지요? 참 미련합니다.

그게 우리를 바보라 부르는 이유였군. 그럼, 머리를 쓰면 뭐가 좋나.

이반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 제가 머리를 사용하여 쉽게 일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늙은 악마는 성의 높은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제가 머리 쓰는 법을 알려 드리죠.

늙은 악마는 소리쳤습니다.

뭘 가르친다고?

백성들은 하나 둘씩 탑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습니다. 늙은 악마는 계속해서 떠들어댔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렇게 떠들고만 있으면 먹을 게 나오나?

백성들은 늙은 악마가 우스웠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에 흥미를 잃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 , 머리를 쓰라고요!

늙은 악마는 며칠을 먹지 않고 떠들다 보니 배고프고 어지러웠습니다. 늙은 악마는 비틀거리다가, 그만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세종 좁은 길 간 사람들

 

2008.01.05. 17:02

이세종

성경을 읽고 그대로 실천하였던 이공

 

예수님의 참된 제자 이세종 선생님은 한국의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분이다. 그는 10여년 이상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40세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 몇 해 후에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에게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이처사라 불렀으나 정작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공()을 친 사람이니 이제부터 이공(李空)이라 불러달라고 하였다. 이공은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 시켰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고 하면서 철저한 영적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 중의 한 분이 맨발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다. 그리고 이공은 특히 순결사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을 따라 개신교 수도단체인 동광원이 탄생되었다.

이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독사도 죽이지 않았고, 자기 발 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 산길을 갈 때에는 칡넝쿨이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옮겨 놓았다. 이처럼 그는 산천초목과 금수곤충까지도 사랑했으며, 모든 생명 가진 피조물을 경외하며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세속적인 소유를 모두 버리고 철저히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따르고자 하신 분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실천했던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제 36년의 암울하던 시기에 전남 일대를 밝게 비추는 빛으로 사용하셨다. 이세종 성자의 진실된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밝고 거룩한 빛이 비춰지기를 소망해본다.

 

불신자 시절

1880, 전남 화순군 동광리에서 삼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영찬이었다.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정직해서 무슨 일에든지 부지런하고 충직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 형님 댁에 같이 살던 그는 28세 때 동광리에서 20여리 되는 청풍면 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머슴을 살았다.

남의 머슴을 살면서 혼자 노력하여 한글을 배웠고, 부모대신 형과 형수에게 효도하였다. 짚신을 삼아도 제일 좋은 것은 형과 형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을 자신이 신었다. 성격은 솔직하고 급하였다. 그리고 한 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만금이 생긴다해도 하지 않았고, 한 번 결심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로 했다. 산에 나무하러 갈 때에도 그 날 몇 짐을 하리라고 작정했으면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대로 하였다.

그는 나이 30세에 자신보다 16살이 어린 소녀를 결혼식조차 못 올리고 데려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문순희였는데,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아주 무식한 처녀였다. 결혼을 한 이공은 십년 작정을 하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게 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겨울에는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돈을 모았다. 그래서 10년 후에는 동광리 부락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산당(山堂)을 짓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었으나 아내가 생산하지 못하였으므로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을 얻고자 무당의 권유로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짓기로 했다. 산당을 짓는 동안 그는 상가집의 연장은 빌리지도 않았으며, 재료는 제일 좋은 것을 사용했고, 샘물은 삼중으로 파서 정한 물을 구별시켰으며, 마당에는 연못을 파고 정원도 꾸몄다.

이렇게 산당을 3층으로 준공한 후에 무당과 함께 살면서 제사상을 차리고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얼마 후에 무당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하늘같이 받들던 무당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는 모든 정성이 허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이 산당은 성경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나 가르침이 없이 혼자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레위기를 읽어보니 거기 나오는 제사법이 자기가 산당에서 차려놓고 지냈던 제사법과 비슷하여 신기하게 생각했다.

 

성경을 계속 읽는 동안 그는 산당에 열두 제상을 차려놓고 촛불을 켜고 매일 공을 드렸던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며 그동안 자신이 잡신에게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그는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의 위대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그동안 해온 미신 행위를 모두 버리고, 산당에 꾸며 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잡신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만큼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정성이 지극했다. 그는 나이 40세 때 노나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고 너무도 기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서서 아랫도리가 벗어진 줄도 모르고 두 손을 치켜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회개와 변화

이공은 예수님을 믿은 후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었던 죄를 일일이 떠올리고 모두 배상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버릇대로 남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콩잎을 뜯어먹은 것을 생각하고 그 콩밭 주인을 찾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값을 변상해주었다. 또한 자기 돈과 곡식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늙은이와 어린애가 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었다. 거지나 나그네가 찾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공은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연구하였다. 밤에 혼자 앉아 성경을 읽을 때면 !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혼자서 자문자답(自問自答)하였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세종이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는 성경을 한구절 읽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예수를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1:8)고 하신 말씀을 보고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살던 동광리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찾아다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식사도 잊고 전도하였다. 한 번 전도하러 갔던 집을 계속 찾아갔기 때문에 한 집을 다니는 데에만 짚신 세 켤레가 닳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 삭개오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가 갚겠나이다”(19:8). 그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여기 있소! 당신의 문서 도로 받으시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시오.” 그는 빚진 사람을 불러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질러 버렸다. 물건이든 돈이든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공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을 안에는 그에게 빚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덕행을 보고 면()에서 그의 송덕비를 경찰지서가 있는 통정리 마을 길에다 세워주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그는 사색이 되어 면사무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면서 사람의 유언이나 송덕비는 그가 죽은 다음에라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에게 무슨 송덕비를 세웁니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그런 비를 세울 일이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면에서 그 비석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조그만 일에도 생색을 내며 공명심에 사로잡히는 작금의 세태와 얼마나 다른가!

그는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몸에 구제할 돈 얼마와 자기가 사사로이 쓸 돈 얼마를 따로 가지고 다녔다. 구제할 돈을 따로 가지고 다니다가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주었다.

 

그는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는 복음 전도비, 둘째는 세금, 셋째는 남에게 갚을 것, 넷째는 구제비, 다섯째로 접대비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생활하고 없으면 굶어 죽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쓰라고 했다.

남을 구제하는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제는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내어서 구제해야 참 구제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준다해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2000.9)

 

4. 청빈거사(淸貧居士)

이세종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은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공()을 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이었다.

 

하루는 여제자 오복희씨가 이공에게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묻자, “얻어 먹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스승의 충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자기는 도저히 그 교훈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여러 해 동안 망설이다가 어느 겨울 눈오는 날 그녀는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섰다. 탁발을 실행했다.

 

구걸하러 다니면서 냉정히 거절하며 주지 않는 집을 거듭 세 번씩이나 드나들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했다. 입으로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란 찬송을 부르면서.

이공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믿는 일에 아예 퐁당 빠지려했다.

 

거지가 되려하고, 남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고 이단자 같이 되려고 각오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그 정신을 넣어 주려고 훈련을 시켰다.

 

이공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누더기로 만족했다. 이공은 기도 중에 도인(道人)은 화려하면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몸에는 거친 옷을 입으나 가슴 속에는 을 품고 있다고 했고, 장자는 참다운 성인은 혁혁한 광채를 벗어버리고 평민과 범인(凡人) 속으로 피신한다.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린다고 했다.

이공도 말하길, “좋은 옷을 입고 길을 가보라.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부러워 뒤를 돌아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간다면, 아무도 돌아다 볼 사람이 없다. 내가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면, 남들이 부러워서 빚을 내서라도 그 흉내를 내려할 것이 뻔한 일이니, 이는 내가 그 피값을 빨아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참 君子는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유행은 사람들의 모방심리를 이용해서 퍼져간다. 거기서 여러 가지 범죄가 파생되는 법이다. TV에서 어떤 유명 연예인이 입던 옷이나 악세사리 등이 순식간에 유행을 타고 급속히 전파된다. 유행의 죄는 맨 먼저 시작한 사람의 죄다. 이공은 외식(外飾)을 원수라고 믿었다. 꽃뱀이나 독사의 겉모양은 화사한 무늬가 있는 법이다. 그는 사람은 겉보다 속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속이 진실해야 한다. 겉을 꾸밀수록 속은 텅텅비고 거짓되어 간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겉을 꾸미는 재주에 능하고, 서로 만나면 손잡고 흔들며 웃고 야단이나 속에는 시기, 질투, 미움이 꽉 차있다.”고 탄식했다.

이공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생활, 꾸밈없이 사는 일이 그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내 속을 다스리는 일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다고 믿었다.

 

한 번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하여 갔는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우스운 모자를 쓰고 거지옷을 입고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도 그 꼴이 신기해서 거지가 설교를 한다고 모여들어 법석이었다.

이공은 의식주 문제를 초월하며 살았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초월했고, ()문제도 초월했다. 그는 심신을 자기 마음 먹은 자유자재로 통솔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음식에 대한 절제가 철저했다.

 

육식은 전혀 않고,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을 가져온 것도 먹지 않았다. 이공 자신이 금식하는 일은 보통이었으나, 남에게는 장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음식대접을 극히 조심하여 좀 더 먹는 다 해도 변소 한 번 더 나녀오게 하는 수고 밖에 더 유익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면서, 배부르기를 구하기 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둘러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 공부가 끝난 다음에야 성경 공부는 공사(公事), 음식먹는 일은 사사(私事). 이제 공사가 끝났으니 사사로 돌아갑시다하며 음식을 먹었다.

그는 남을 구제할 경우에도 자기가 먹을 분량에서 얼마를 덜어서 구제하였다. 혹시 교회에서 위임식이나 무슨 큰 잔치가 벌어져 초대를 받으면, 이공은 참석은 해도 음식은 먹지 않고 자기 몫으로 내놓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구경꾼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는 탄식하기를 이렇게 하니 전도가 안됩니다. 교인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믿지 않는 마을 구경꾼들을 잘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했다. 이세종은 음식 중에 찰밥을 가장 좋아했다. 어느날 그는 찰밥 생각이 너무나서 아내에게 찰밥 좀 하라고 했다. 아내가 5홉 쯤 되는 찰밥을 해 주었더니, 그는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아이구, 이 놈은 죄인 놈이오. 이 놈이 잘못이오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못먹고 앉았다가 기어이 밥그릇을 들고 나가 이웃에 있는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나눠주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날, 식혜를 먹고 싶어해서 아내가 찹쌀 식혜를 만들어 주었더니, 두어 술 떠 먹고는 더 먹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이 놈이 진작 어느 도랑물에라도 빠져 죽지 않고 이제껏 살아온 것이 이런 먹을 것이나 탐내서 죽지 못했던가?”하면서 탄식했다.

언젠가는 능주라는 곳에서 선교사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이세종은 무명옷을 입고 갔다가 불쌍한 거지를 보고는 그만 옷을 바꿔 입었다. 거지의 옷은 검은 옷에 이까지 있고 작아서 볼쌍사나왔지만 그는 태연히 참석했다.

이세종은 한 때 등광리에서 첫째 가는 부자로 삼층 산당을 짓고, 매일 진수성찬에 좋은 옷 입고, 장자(長者)행세를 하던 자였는데 예수를 믿고 철저히 변화되었다.

 

5. 자비심은 물결같이

그는 무엇 때문인지 종종 거리를 울면서 다녔다.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 그는 자비심이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호소했다. 불쌍한 죄인들을 볼 때는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지 않습니까?”하면서 측은해서 못 견뎌했으며, 혹시 잘못한 사람을 볼 때는 꾸지람을 했다가도 돌아서서는 눈물지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보면 답답해 하며 그것을 가져다가 유익하게 써보지 못할 것인데, 왜 헛수고 하는고?”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 이 사람을 잊지 말아 주소서하고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거지가 찾아오면 자기가 먹는 대로 손수 밥그릇을 들고 나가 주면서 다 먹기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빨리 먹고 한 집이라도 더 가서 구걸해야지!” 했다. 그는 덕()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을 위하는 일이라면 억지로 5리를 가자고 청해도 10리를 같이 가 주었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겐 겉옷까지 벗어 주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 주님을 믿은 뒤 이공이 딴 사람으로 변한 것을 이용해서 그의 살림살이가 전부 자기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 때 이공은 한 마디도 답변하지 않은 채 다만 스스로 탄식하기를 이제는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할 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빼앗기는 일이 곧 얻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부자로 살던 그가 예수님 믿고 거지 모양으로 다니니 어떤 때는 친척들이 달려들어 자기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발악하고, 이공의 살림을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망치 않았고, 그들이 바라는 요구 이상으로 편리를 봐주었다.

 

이공은 이 세상의 명예와 칭찬 따위는 털끝 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것은 뜬구름이요 허망한 것이라면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녀선 안된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봉사하려고 해야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고 탐나서 따러갔다간 반드시 시험에 빠질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는 칭찬받기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말하길, “쓸데 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받는 자도 마귀이다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대하였다.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만물들아!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아름다운 산천과 우거진 숲을 바라볼 때면 그는 한량 없이 기뻐했다.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구정물을 담아 둔 동이 속에서 쥐가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워다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고 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개미 한 마리라도 자기 발에 밟혀 바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할텐데 네가 나한테 밟혀 죽다니하면서 울기도 하였다. 이공은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니 만물도 사람에게 반역한다고 말하면서 동물들이나 초목이나 무엇이든지 사람에게 매인 것들을 잘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늘 이공을 따라 다니면서 이런 모양을 곁에서 지켜 본 그의 제자는 말하길,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어디가나 가짜만 많은 세상에서 이공 어른만이 순금인(純金人)이었습니다고 했다. 이공의 가르침은 누가 듣더라도 엄숙하고 두려웠다.

 

이젠 내려가도 괜찮을까요(2000.10)

 

겸손은 매우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낮출수록 높아지며 겸손할수록 고귀해지는 역설적인 법칙, 낮추는 이가 사람일 때 높여주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상관관계에 근거해 있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고 큰 미덕일 것이다. 이세종 선생님(이공)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겸손한 생활을 알아보고자 한다.

 

겸손(謙遜)

어느 날 이공이 거지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가 가는 길에 마침 마을에서 가장 심술궂고 못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이공에게 말하길 어디가? 이리와 봐.” 그 사람은 다짜고짜 이공을 끌고 가더니 길가에 있는 나무에다 새끼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이런 말 한마디하고는 그는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불같이 급한 성격이었다. 이웃집 닭이 자기 집 마당에 들어오면 얼마나 급하게 쫓았는지 닭이 날갯죽지가 빠질 정도로 혼을 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후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그저 예예하였다. 본래 성질이 불 같으면서도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저 순한 양이 되었으니 얼마나 자기를 죽였겠는가? 이공을 나무에 묶어 놓고 간 사나이는 어디 가서 자기 일을 보면서 아침에 한 일을 깜박 잊었다가 오후에 그리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이공은 나무에 묶인 채 잠자코 있었다.

저런, 왜 풀고 가지 않고 여태까지 이렇게 있었소?” 사나이가 미안해 묻는 말에, 이공은 말하길, “매는 것도 법이나, 푸는 법이 또한 있어야 가지오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원망도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박씨 문중의 어떤 사람이 마을 네거리에서 이공을 들어 비석 위에 올려 놓고 꼼짝 말라고 했더니 이공은 온종일 그대로 있었다. 이 자식, 저 자식하여도 그저 예예할 뿐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이공은 그를 보고 이젠 내려가도 괜찮을까요?”하고 묻고서 내려왔다. 박씨는 그때 자기의 소행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으며 후에 그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공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개구쟁이들이 길을 막고 서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팔을 비틀고 괴롭게 하고 어떤 때는 문둥이, 비렁뱅이, 내 아들이라 놀려도 묵묵히 지나갔다. 그러면서 이공은 스스로를 반성하기를 사자의 입도 막으신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입 하나 못 막아내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실 것인가? 아이들이 나를 문둥이라고 욕하는 것은 내 몸이 비록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내 속에 문둥병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 주심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비렁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빌어먹으니 옳은 말이다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그는 자기 마음에 행여 교만심이 일어날까 봐 길을 다닐 때에는 거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는 항상 겸손을 배웠고, 예수님처럼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이공은 자기를 높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옷이나 태도, 심지어는 꿈에서까지도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옷도 남보다 좋은 것을 입으면 그 옷이 마음에 교만을 일으켜 어느 새 남을 낮게 보고 멸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는 상을 차려 먹지 않고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혹시 누가 밥상을 차려와도 마음이 높아진다고 싫어하고,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그는 어디를 가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 어떤 동기에서 가고 싶어하는가 반성해 보고,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뜻이라고 느껴져야만 비로소 일어섰다.

 

같은 마을의 어느 집에 찾아 갈 때에도 그랬고, 어디서 유숙하게 되는 경우에도 꼭 성령님의 뜻을 물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선 대문에서 발을 멈추고 자기 마음을 일단 반성해 보았으며, 마음에 지금 찾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되돌아갔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이 말씀처럼 사랑이 없이 누구를 찾아간다면 상대편에게도 자기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성령님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는 누구나 쉽게 받는다. 성령님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하여야 한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뛰쳐나오는 것과 같이 자기에게 달렸다.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성령님은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 다음에는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인데 이것은 성령님을 완전하게 받는 것이다. 완전하게 받으면 그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릇에 물이 가득히 담기면 넘쳐 흐르는 듯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8:9).

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면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과 욕심을 순간순간 십자가에 못박아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신자가 건전한 믿음생활을 하려면 신비’, ‘경험’, ‘지혜’, ‘지식의 네 가지를 겸전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공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거지가 구걸하건, 반가운 귀빈이 오건 집 식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대접하였다. 어떤 때 부인이 화를 내면서 거지를 박대하는 눈치이면 아내를 타이르면서 거지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이니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어떤 거지는 구걸하러 와서는 이공 댁에서 평소에 먹는 대로 주니까 너무 형편이 없는 음식이라서 안 먹고 가는 이도 있었다. 때로 이공은 거지에게, “당신은 혹시 마을 잔치 집에 가서 한끼라도 잘 먹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이 놈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부터는 지금까지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넣어 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이공이 병중에 있을 때, 미국인 노나복 선교사가 지나가다가 소식을 듣고 귤 몇 개를 이공에게 드리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병이 회복된 후 계란 얼마를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문병 왔을 때에 잘 대접하지 못한 일을 사과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을 존대할 줄 알았고, 목사를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망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어느 목사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다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그래도 목사라면 교인들을 앞에 놓고 남을 가르치는 분이신데 그럴 수 있겠소. 그만 두시오라고 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계속 험담하자, “여보시오, 그만 두라면 그만 두지 왜 그러시오. 그런 말은 남의 험담이란 말이오. 남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지 않았소하고 말렸다.

이공은 남들의 칭찬이나 악평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평에 따라 태도를 달리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여전히 한 길을 갔다. 자기의 명예나 호평 따위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생활 태도가 성경에 비추어 보아 맞느냐 안 맞느냐 반성할 뿐이었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는 일이나 존대하는 일은 절대로 싫어하고, 그런 것은 마귀 대접이라 여겼다. 칭찬이라는 것은 약자가 받으면 교만이 생기는 법이요, 덕이 장성한 사람이 받을 때는 도리어 괴로울 뿐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칭찬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 따위는 털끝만큼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만 애를 썼다. 눈 한 번 뜨는 것, 발 하나 옮겨 놓는 것까지도 진리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지혜롭게, 솔직하게, 양심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솔직했고, 남도 솔직한 것을 좋아했다. 솔직하지 않을 땐 책망했다. 무엇이나 사실대로 해야지, 사람이 일부러 꾸며 만든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절대로 금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며 사람의 칭찬을 즐기지 않는다.

바로 이공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았다. 자랑은 교만이 되기 쉽고, 교만은 쉽사리 많은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온전한 처세를 위하여 빼어 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겸손은 지혜로운 자의 몫이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2000.11)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聖經)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感動)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속에서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이 아니며, 성경을 읽으면서 겸손되이 순직하게, 또한 성실하게 읽을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된다.

 

성경 연구

이공은 세상적인 학문은 많이 접하지 못했으나 그토록 유명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있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이공은 제자들을 앞에 놓고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이렇게 권면했다. 참 기독교 진리의 세계는 좁은 길이다. 그는 농부가 밭에서 무 뿌리를 파는 비유를 들면서, 신자는 성경을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공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거의 통달할 정도였다. 낮이면 종일 성경을 읽고, 밤에는 암송을 했다. 성경 요절을 밤을 새워가며 암송하고 요지를 표해 놓았다. 제자들 앞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펴들고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게 된다고 하면서, ‘남을 가르칠 때는 성경을 눈에 대고 내가 배우고,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때는 성경을 마음에 대고 읽어야 한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밖에 안 보이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이렇고 저렇고 말을 하지만 성경을 들고 앉아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다 모릅니다. 신자는 신·구약 성경과 찬송가를 늘 읽고 부르되, 그것을 생선으로 비유한다면 구약은 머리 토막과 같고, 신약은 가운데 토막과 같은데 찬송가는 꼬리와 같습니다고도 했다.

또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성경은 밥이요, 찬송가는 국과 같다고 했다. 누군가 무슨 질문을 한다든지,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곧, “성경을 찾아봅시다. 성경 본문 그대로가 참 진리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자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할 때에는 이공은 안에는 신()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나 그 앞에 있으면 유리관 속을 들여다 보듯 자기 마음에 품은 것을 숨길 수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더욱 두려워했고, 그의 앞에서는 괜히 떠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조심할 데 가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도 조심하지 않아도 좋을 데서는 조심하노라 하니 그래선 못쓴다. 병원을 가면 병을 고치고자 다 털어놓 듯이 우리도 서로 털어놓고 고치자는 것이 아닌가?”고 하였다.

그는 남에게 바로 말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서 남이 말씀대로 살지 않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 가르쳐 고쳐주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나 성경을 읽는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는 성경을 읽는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에게는 멸망이니라”(10:29)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정직한 자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소화시켜 유익을 얻으나, 악인은 도리어 성경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1:15-16).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이 해야 한다. 음란을 멀리하고 양심이 맑아야 성경을 읽어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닫는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나 아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바로 읽으려면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공은 성경을 읽으며 탐구할 때 남들이 엿들어 보면, 그는 혼잣말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공이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읽은 말씀을 꼭 실천하였던 이공

이공은 단지 성경 연구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한번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주의였다. 그는 성경과 실제생활의 일치에 전력했던 사람이다.

어느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는 중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탄식하며 고대한다’(8:18-22)는 성경을 설명하다가 바로 앞에 앉아서 듣고 있는 박복만씨에게 말했다.

당신, 지금 앉았다가 누웠다 하고 있는 그 자리를 좀 보시오.”

박공이 자기가 앉아 뭉게고 있는 풀밭을 보니 마치 멧돼지나 산짐승이 뒹군 자리같이 풀들이 어지럽게 깔려 쓰러져 있었다. 이공은 그 풀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 풀들은 지금 탄식하오, 안하오?”

헤헤, 탄식합니다.”

박공은 그렇게 지적을 받으니 좀 미안했다. 이공은 모르고 한 일은 괜찮아요. 알고 지은 죄가 벌이 중하오하고 나서는, “그렇소.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생의 가치가 없는 거지요했다. 그날 성경공부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길가에서 쉬는 도중에 손에 쑥 한 포기를 뜯어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쑥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소?”

. 색깔이 변치 않는 것,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나는 것 등 쑥 한 포기에서도 배울 것이 많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처럼 변함없이 믿는 마음을 가지려고 피차 애쓰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 볼 때는 쑥뿌리보다 더 쓴 것이 진리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꿀보다 더 단 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잘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공은 비록 세상 학문은 배우지 못했지만 타고난 지혜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처럼 영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도암면 등광리 근처 동두산 마을 박씨촌에 박참봉이라는 한학자(漢學者)가 있어서 시골 마을에서는 내노라 했다. 한 번은 그가 이세종을 찾아와 자기의 한학(漢學)을 자랑 삼아 이공에게 까다로운 질문 공세를 편 일이 있었다.

박참봉은 천자풀이와 주역(周易)으로 이공에게 질문하고, 이공은 성경을 가지고 대답하는데, 그만 박참봉이 감복하고 말았다. 그후에 박참봉은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사재를 들여 그 마을에 교회 건물을 지었으며 다시는 주역(周易)을 보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서 꾸준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세종파를 만들지 말라

이공은 남의 일을 비평하지 않았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교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서 구원의 자녀들을 나게 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공은 제자들에게 말하길 자기 강의만 듣지 말고 다른 교회 집회나 도시의 큰 교회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다. 누구나 한 편 소리만 들어선 바로 깨닫지 못하는 법이며, 껍데기가 있어야 알맹이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이세종파를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공에게서 배운 바를 어디에서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을 어디에서 받았느냐?” 묻는 일이 있으면, 이공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말고 천태산 바위 밑에서 받았다고만 대답하라고 일러주었다.

이공이 제자들과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예배를 드릴 때 연보를 가지고 온 이들에게는 일일이 물어 보았다.

이 연보를 식구들이 알게 가져왔소? 모르게 가져왔소?”

만일 집안 식구들이 모르게 가져온 연보라면 하나님은 그런 연보를 절대로 안 받는다고 도로 가져가라고 명했다.

아니, 한 번 가져온 연보를 어떻게 도로 가져가요?” 하는 이가 있으면, 이공은 이리 주시오. 내가 갖다 드리지했다.

성탄절 연보도 그러했다. 쌀 얼마를 가족 몰래 가져온 이가 있었는데, 이공이 자기가 친히 그 연보 쌀주머니를 안고 그 교인의 주인댁에 내놓으며 사유를 설명하자 그 집 가족들이 도리어 황송해 하면서, “이처사, 그러지 마시오. 한 번 바친 것을 어떻게 도로 받습니까?” 했다. 이러한 가족들의 진심을 알고 나서야 댁에서 허락하신다면 도로 가져 가겠습니다하면서 가지고 나왔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공을 신용했다.

 

이공은 이처럼 빛을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했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였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새롭게 다짐해야만 한다.

 

고난을 통해 천국에 상급이 저축된다(2001.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인생은 이 땅 위에서는 고역이라는 말씀처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어떤 때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 시련을 잘 견디어내기만 한다면 매우 유익함이 많다. 사람이 시련을 당하므로 더욱더 겸손해지고 영혼은 더욱더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광야 4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들을 이런저런 환경 속에서 시련을 주신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겸손하고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는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시련 속에서 연단을 받아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을 본받아 성화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세종 선생님은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신 분이라 하겠다.

 

고난을 사랑한 이공

일제 말엽, 일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던 때, 이공은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피해 다니며 숨어 있으라고 권했다. 왜냐하면 붙잡혀 감옥에 갇히든지 순교하는 일은 내 영혼 구원 얻는 데는 좋으나, 그렇게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범죄할 기회를 주어서 그들에게 살인죄까지 짓게 하는 것이니 차라리 숨어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공 자신 또한 신사참배 때문에 피해 다니다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화학산 깊은 산 속에서 3년 간 살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될 때까지 극심한 고생을 하였다. 방을 작게 짓고 문도 좁은 문으로 만들어 몸을 구부리고 겨우 들어가게 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전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음식은 처음에는 보릿가루나 도토리 가루 등을 먹었으나 시일이 지날수록 음식의 분량을 줄이면서 마지막에는 밥이 죽으로, 죽이 가루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달은 물로 바뀌고 나머지 한 달은 공기로 변했다. 3개월 동안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으니 몸의 살은 빠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눈은 우물처럼 움푹 들어가 두 눈동자만 광채가 났다. 제자들은 이런 그를 두고 살아있는 가죽 성경이라고 하였다.

겉사람 즉 육성의 기능이 점점 떨어질수록 속사람 즉 영성은 더욱 맑고 새로워지는 법이다. 육이 살면 영이 흐려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육신은 더욱 쇠약해가지만, 반대로 영은 더욱 맑아지는 법이다.

이공은 환난과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섭리를 믿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도리어 사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굳게 믿었다. 그에게는 생활의 어려움, 가정의 고난,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고통 등이 계속되었다.

이공은 제자들에게 병들었다고 울지 말고 나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후에 또 올 병을 생각하라. 부자라고 기뻐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한탄 말라. 화가 복이다. 이 이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람들은 자기 살림에 특별한 축복이 없을 때에라도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이 곧 복인 줄을 모르고 있다. 신앙생활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고 당장 무슨 큰 복이 쏟아져 내려오지 않더라도 재앙이 오지 않는 것만 으로도 복인 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느 때 이공은 팔에 종기가 나서 무더운 여름날 동안 낫지 않고 계속해서 고통이 더해갔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아무 때라도 한 번은 썩을 몸, 죽으면 모조리 썩을 것이니 살아서부터 썩은들 어떠랴하면서 약도 쓰지 않고 견디었다.

의인은 환난을 기뻐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믿음이다.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쓰라린 경험을 많이 겪은 이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경험이 곧 믿음이다. 많이 경험할수록 잘 믿는 것이다.”

고난은 천국 상을 버는 일이다. 무슨 고통과 어려움이라도 다 당하라. 많이 겪을수록 좋다. 많이 벌어 놓고 빚 갚는 일과 같고 더구나 내가 별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할 때에는 상을 받게 된다. 세상에서의 고난, 학대, 핍박받는 것에 대한 삯이 바로 다시 오는 세상의 영광이다.”

그의 가르침은 고난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기복사상에 사로잡힌 연약한 성도들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었다.

고난을 자원해야 한다. 고난을 일부러 벌어서 겪으면 값비싼 경험을 얻게 된다. 그런 이는 앞으로 시험이 닥칠 때 넘어질 위험성이 적다.”

이 세상에서 나 하나를 살리려면, 남을 밟고 그 위에 내가 올라서지 않고서는 어렵다. 남을 넷, 다섯 죽이고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런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려면 항상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자기에게 강한 것,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살아야 한다.”

신자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십자가가 무엇인가? 사람에게 거리끼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 형틀은 가로 세로 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런 십자가를 등에 지고 좁은 문으로 통과해 보라. 가시덤불 사이로 지나가 보라. 아무 데도 걸림이 없이 쉽게 통과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십자가는 남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자기의 팔다리를 십자가처럼 두 팔 뻗고 활개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보라. 그런 모양으로 자기 집 봉창 문이라도 나가려 해 보라.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공의 교훈이요, 그가 밟고 간 길이다. 고난의 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이공은 수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길, 한 가지 방법으로만 말고 때로는 도시에서, 때로는 산중에서, 때로는 많은 군중 속에서, 또는 혼자서 고독하게 골고루 경험해 보아야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시작할 때는 몰라도 결론은 모두 좋게 맺어질 것이라고 했다.

수도는 고생을 겪어보며 연단 받으려는 것이니까 넉넉한 생활 속에서는 수도가 되어질 수 없다. 수도자가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면서 수도한다고 하면 남들이 비웃기도 하려니와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수도하려는 사람은 아예 빌어먹을 작정을 하고 나서야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금식하는 일에 관해서 말하길, 사람이 보는 데서 자랑하거나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신자는 무엇이나 세상에서는 사람 앞에서 숨겨야 한다. 그는 사람의 존경이나 칭찬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다. 괜히 금식, 금식하고 다니면서 말을 듣지 말고, 있으면 감사히 받고 없으면 말라고 했다.

또한 이공은 하나님은 큰 사랑이시니 은혜를 주시는 데 있어 누가 고생을 많이 하고 애쓴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부자나 깡패에게라도 그 아버지는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믿는 신자들이 고난을 겪는다. 사단이 자꾸 송사하니 그 답변으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고난을 겪게 하신다(욥기1:9-12). 신자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하게 살게 하다가 죽은 후에 천국에 보내고, 불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생만 겪게 하다가 죽은 후에도 지옥에 보낸다면, 마귀가 참소할 것이다.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에 몰려 스스로 지옥으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자들이 이 이치를 모르고 고생이 싫다고 야단들이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우편에 달린 강도가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23:41)고 겸손하게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닥쳐온 고난을 도리어 감사하게 받아야 하겠다.

그는 말하기를 신자는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성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 계시는 동안 성부께서 그를 어떻게 대우 하셨는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남루한 옷 그대로 묻으라고 부탁하면서, “좋은 옷 입혀 땅에 썩히면 죄가 되오. 나의 떨어진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요라고 하면서, 1942년 음력 2월 추운 겨울에 그토록 사모하였던 주님의 품으로 갔다.

 

돌아온 탕녀의 참회생활은 깊어가고(2001.2)

 

결혼한 여자가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단란한 가정을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적인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여 집을 나가 외갓 남자와 두 번씩이나 살림을 차리며 살던 아내가 있었다. 그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그 여인은 결국 회심하고 그 후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았다. 이 여인이 이세종(이공) 선생의 부인 문순희 여사다. 필자는 거룩한 한 남편이 강퍅한 한 아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세종은 백명의 교인들보다 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이공의 부인은 일자무식이었고 생각하는 것도 좁았다. 또한 조급하여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이런 부인에게 이공은 말하길 당신은 산골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샘이 많은 여자라서 도심지에 가서 살게되면 성격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고 자주 말하였다.

이세종은 예수님 믿기 전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그때 아내를 얻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0세였고, 부인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녀는 이공에게 시집와서 세상의 다른 부부들처럼 재미있게 정을 나누며 살지 못했고, 자녀마저 낳지 못했다.

남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순결한 삶을 결단하고 이제 우리는 남매처럼 살아야 한다고 침소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 많던 재산마저 다 남에게 주어버리자, 부인은 견디다 못해 이렇게 사는 내가 그의 아내냐?”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어떤 청년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부인이 딴 남자와 눈이 맞아 나가버린 것을 알게 된 이공은 그 집을 찾아가서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권하였다. 이공은 부인과 살림을 차려 살고 있는 그 남자에게도 말하길,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내 죄 때문이요.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제발 저 여자를 돌려보내 주시오하면서 그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였다. 그럭저럭 몇 해 동안은 살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여론이 나쁘고, 그 남자는 여자가 썩 마음에 드는 점이 없어 여자를 돌려보내고, 자기는 부끄러워 이사를 가 버렸다. 부인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이공에게로 돌아왔다. 이공은 돌아온 아내를 탕자를 맞아들이듯 받아들였고 옛날과 다름없는 태도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또 다시 집을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능주 고을에 산다는 어떤 홀아비였는데, 아이들만 여럿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부인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듯이 살림을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다. 이 세종은 능주로 가서 홀아비와 살고 있는 아내를 찾아갔다. 마치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로 타락한 아내 고멜을 찾아가 타이르듯이 아내를 찾아갔다. 찾아가도 왔느냐는 말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 아내를 보고, 이공은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일은 두려운 일이니 마음을 돌이키시오라고 일러주었다.

이공은 이렇게 몇 번을 찾아가서 아내를 타일렀다. 이렇게 찾아온 남편에게 부인은 어찌나 싸늘하게 대하는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 무엇 때문에 치근치근 자꾸 와. 나 망신시키러 왔어?”하며 구정물을 퍼서 이공에게 끼얹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이공은 비 맞은 생쥐꼴을 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꼭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살다 못살겠으면 꼭 돌아오시오하며 간곡하게 권면했다. 부인은 그 남자와 몇 해를 살았으나 결국 그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공에게로 돌아왔다.

이런 수치스러운 여자를 누가 받아 주겠는가? 부인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돌자,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품행이 나쁜 이런 여자를 우리 동네에서 살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많은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지만 그 여인을 용서해 주었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공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시키면서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용서하여 주시오하였다. 이세종은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이공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로 낙인찍히게 되었으나 정작 이공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전에는 부인에게 무관심하던 이공이 이때부터는 부인을 앉혀 놓고 무식한 그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글을 배우시오. 글을 배워 성경으로 벗을 삼으시오. 성경 못 보면 외로워 못 삽니다.” 이때부터 부인은 이공에게 한글을 배워,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가지 성경으로 벗을 삼고 살았다. 이공은 참으로 한국의 호세아였다. 부인 문순희씨는 그 후부터 마음을 고치고 변하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공이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딴 생각을 버리시오. 당신은 욕심이 많으니 도회지에서는 살 수 없고 이 산 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라고 했던 남편의 권고에 따라, 그녀는 이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의 무덤을 3년 동안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 자녀 하나도 얻지 못한 그녀는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참회의 삶이었다.

3년간이나 그 쓸쓸한 산중에 홀로 살면서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아랫마을로 내려와 보리 이삭을 주워 식량에 보태고, 벼가 나면 또 벼이삭을 주워서 연명했다. 그리고는 산나물로 살았다. 남편인 이공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유언하길, “언덕으로 벗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시오라고 말했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다. 그녀의 말년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고독했으나 꾸준히 지난날을 참회하면서 남편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예수님을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 자이다라고 하면서 감사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녀는 자신같은 여자가 좋은 남편을 만난 덕분에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것을 감사했다. 누구하나 만나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고독과 고난 속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갔다. 겨울에도 내복 한 벌 없이 무명 옷 한 벌로 지냈다.

이공의 부인은 깨달음이 점점 깊어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믿어야 참이 오지, 안 믿으면 거짓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정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권했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부인은 수십 년 더 살면서 77세에 임종할 때까지 남의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믿는 사람들이 혹 나무를 한 짐씩 가져다주면, “이런 죄인이 황송해서 어떻게 그런 나무를 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기어이 되돌려 보냈다. 밤에 잠잘 때는 나 같은 죄인이 어찌 하늘을 마주 보고 눕겠습니까?” 하면서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다.

병들어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생활 일체를 자기 힘으로 했고, 다른 신자들이 도우려면 절대 사양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거룩한 생활이었다. 이공의 부인은 임종이 가까워 오는 병상에서 돌봐주는 분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그녀가 사랑한 성경구절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54:1)는 말씀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길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치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더라”(23:29)는 말씀이었다. 이공 부인은 슬하에 자녀 하나 없었으므로 이 말씀들이 더욱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마지막 임종시 그녀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니 없다면서, “나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인데 누가 보고 싶겠어요?”하면서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을 감았다. 이세종은 살았을 때, “시종이 여일해야 한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라야 안다고 했는데, 그녀의 임종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웠다.

일자 무식하고 생각하는 것이 좁고 성격이 급하여 쉽게 화를 내었고,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해 자신을 불행한 여자라 생각하여 두 번씩이나 집을 나가 딴 살림을 차렸던 여자. 그러나 다시금 남편의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남편을 통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고 남편처럼 청빈과 순결과 순종을 추구하면서 산 속에서 예수님과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참회하는 삶을 살았던 여자. 그리스도 안에서 승화된 삶을 사신 문순희 여사를 생각하면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신앙자료 이세종선생(1880-1942)의 생애와 사상

광야의소리 2013.05.31 06:02 조회 수 : 1919

이세종선생(1880-1942)의 생애와 사상  
1. 예수를 몰랐던 시절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동광원의 창시자인 이 현필 선생의 스승이 바로 이공李空 이세종 선생이다.
이공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형님 밑에서 자라났다.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일만 알고 글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 한글을 깨쳤다. 정직하고 충직해서 틈틈이 짚신을 삼아서 형님께 드리고 일년 품삯을 형님께 양도하였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나서 다 못살아도 그이만은 살 것이라고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형님들을 가까이 모시고 도와드렸는데 형님들의 가산이 차츰 늘어나 살만큼 되자 그제야 결혼을 생각했다. 나이 30세에 14살의 시골 처녀와 결혼하였다. 살림을 차린 후 지게를 맞추고 이 지게가 다 닳도록 일해서 그간에 살림을 이루리라결심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일을 나섰다. 겨울이면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저축하고 형님 댁의 살림도 보살펴 드렸다.
마침내 그 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마을 사람치고 그에게 빚을 지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답도 늘었지만 잘 입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살았다. 이렇게 이공 자신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일가친척들은 자주 도와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지게를 지고 일을 했던지 지게가 다 닳아져 어린애라도 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후 15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보고 싶은 소망에 무당을 불러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무당이 하라는 그대로 복종을 하면서 정성과 지성을 다해 아들 낳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무당의 지시에 따라 산당을 짓고 공을 들였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지성껏 공을 들여도 헛됨을 알고 그해 이사를 했다.

2. 성경과의 만남과 회개
이공 이 세종은 우연히 붉은 거죽의 한글로 된 책을 보았는데 하나님을 찬송하는 책이라 하니까 첫눈에 마음에 들어 빌려다 읽고, 얼마 후 또 다른 책은 없는가?” 묻자 그들이 구약을 빌려주어 성경을 보게 되었다. 이공은 구약을 창세기부터 자세히 읽어 가는 중에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이제까지 신당을 짓고 상을 차리고 촛불을 켜고 떡을 차리고 백지로 꾸며 복을 비는 그 제도가 구약시대 성전의 제사의식과 흡사함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신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그이는 마침내 아들 낳게 해달라고 무당에게 공들이고 복 비는 것이 헛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미신 행위를 청산하고 산당에 꾸며놓은 모든 제사 기구들을 불살라 버렸다. “너희는 너희의 복이라 타라하시며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동안 공들이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다 일소한 후에 무당에 공들이던 그 열성을 하나님께로 돌려 정성을 바쳐 기도하며 말씀을 살폈다. 머슴들의 휴식처인 사랑방에서, 창세기 일장 일절부터 하루 밤에 한 절씩 암송하기를 몇 달을 하고, 성경 읽는 산당까지 마련하여 탐독하다가 복음에 통하였다. 밤이면 기도하고 낮에는 말씀을 읽곤 하는 생활을 수개월 동안 계속 하였다. 마침내 그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아들을 낳겠다는 마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식들을 얻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만 열심히 섬기며 전도도 하였다. 그이의 전도로 마을 사람들이 다 믿게 되었다. 이웃마을까지 전도하고 간증도 하고 어떤 때는 식사도 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자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런 그이를 보고 미쳤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리마다 전곡을 나눠주고 길가는 나그네나 거지들이 오면 모두 대접해 보냈다.

3. 모든 빚을 탕감해줌
그이는 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갚을 수 없는 빚들은 다 탕감해주고 빚 문서인 차용증서는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이한 후에 빚은 다 받았으니 안심하라.”며 위로했다. 빚진 자들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나서 이제 그에게 빚진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물건을 꾸어간 사람들에게도 그냥 다 가지라.”했다. 일대 희년을 선포한 것이다. 그 마을에서는 전무후무하게 희한하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꿈처럼 믿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사실이었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산에나 들에 나가서 일군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콩 한 포기라도 뽑아먹었던 기억이 있으면 그 임자에게 찾아가 자복하고 다 갚았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차한 대로 무엇이나 다 도와주었다. 곡식은 모아두었다가 노인과 어린이가 있는 가난한 집에 나누어주었다. 당신 자신은 콩 잎사귀 얼마도 아까워 못 먹고 살면서 그렇게 했다.
그러자 일년에 으레 한 두 번은 아프던 몸도 모든 병이 물러가 건강해지고 기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경이 아니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라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따라 믿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는 그의 선심에 감동하여 그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신도들과 함께 나와서 오직 하나님만 공경할 것과 자기의 명예는 나타낼 것이 없으니 비석을 당장 넘어뜨려라 했다.
내 손으로 이 사람들을 시켜서 비석을 없앨 수는 있으나 당신들이 세워놓은 비석을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당신들 손으로 무너뜨리시오하고 권유했다. 면장과 면민들은 이왕 비용을 들여서 세운 것이니 그대로 두자하며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안 무너뜨리면 그이 자신이 없애겠다고 완강하게 나오자 할 수 없이 면민들은 그 자리에서 땅을 파고 묻었다.

4. 오직 말씀으로
그는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에게는 금식이 더 좋은 식사였다. 성경을 들고 있으면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 지도 몰랐다. 밤이나 낮이나 분간이 없었다. 어쩌다 병이 나면 곡기를 끊었다. 병중에는 죽이나 숭늉이나 미음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니 콩잎사귀 죽 같은 아주 거친 음식이 주였는데 병중에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
그이는 아파도 매양 약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하지만 병이 나면 약을 쓰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이다. 의의 약이다. 이 약을 쓰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썩어도 썩지 않는 생명의 몸으로 부활한다. 몸은 아무 때 썩어도 썩는 것이니 그대로 버려두라.” 그이는 오래 아프면 이제 죽을 것이라하고 죽음을 기다렸고 회복되면 살려주신 것을 감사했다.

5. 신비체험
어느 해 겨울 이상한 중병이 나서 두어 달을 아팠다. 열병에 신음하면서도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았다. “예수보다 좋은 의사가 어디 있으며 신약보다 좋은 약이 어디 있느냐?”하며 버텼다. 열흘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하루는 밤에 제자 이 상복에게 산에 있는 예배당에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죽어도 산당의 기도실에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들어 드리자 해서 업고 가는데 가죽과 뼈만 남아서 가볍기가 나무 같아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추운 겨울인데 불도 없이 차가운 냉방에 뉘여 놓았다. 이상복은 당시 20대의 청년인데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팔 다리를 주물러 달라 해서 주무르는데 여의치 않았다. 한 밤에 이공의 몸은 반쯤 굳어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이공은 제자에게 자기 몸을 힘껏 흔들어 달라 했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오자 그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자에게 뜨거워서 못 견디겠으니 연못의 얼음을 깨 오라 했다. 물을 떠다 머리를 축이고 몸을 문지르라고 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켜서 못 가로 갔다. 못 가로 가서 옷을 벗고 얼음을 깨뜨리고 퍼낸 물을 온몸에 끼얹었다.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이렇게 세 차례나 얼음물로 샤워를 했다. 의아해 바라보는 제자에게 이제야 정신이 드는군.” 했다.
그때 이공은 건너편에 이상하게 빛나는 광채를 보았다. 이공은 이 상복에게 저기 정자나무 밑에 무엇이 안보이시오?” 하고 물었다. 제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럴 것이요. 영의 눈이 열려야 보이지 육안으로는 안 보일 것이요.” 이렇게 말하는 이공의 얼굴에는 감격과 기쁨이 가득했다. 초자연적인 힘이 쏟아짐을 체험했다. 그의 열병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옷을 입고 뛰어 나와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이 사는 것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증거 하였다.

6.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라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하였다. 칭찬을 마귀의 시험으로 알고 남이 높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고 심지어 마음이 교만해질까봐 상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싫어하였다. 도움을 받은 이들이 감사의 사례라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시오? 저를 시험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였다.
걸인에게 무엇이라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오하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내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당신들에게 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그이는 사람을 대접하는데도 차별이 없었다. 거지에게 대접해도 꼭 당신 집에서 잡수시는 대로 대접했다. 누구나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꼭 같이 접대하였다. 그것이 주는 이에게 복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주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바른 가르침이 곧 사랑이라 하였다.

7. 겸손과 사랑
당신은 또 절대 교만을 몰랐다. 옷만 다른 사람보다 낫게 입어도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게 된다고 낡은 검정색 무명옷만 입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거지만도 못하였다. 한번은 어떤 분이 식혜를 갖다 드리면서 선생님께서 잡수시고 싶어 하신 음식이라 올렸다고 했더니 두어 번 떠 잡수신 후에 숟가락은 놓고 이놈이 진즉 나무끄렁에라도 치어죽지 않고 이때껏 산 것이 이것을 못 잊어 못 죽었는가?” 하며 통곡하였다. 또 찰밥을 해오자 찰밥을 붙들고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잡수시지 못하고 눈밭을 누비며 찰밥을 할 수 없으리만큼 가난 한 집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셨다.
올기 쌀이 생기면 가난해서 농사도 짓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다 돌려주신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 입에 넣으셨다. 그이는 언제나 세상의 명리를 뜬구름처럼 생각하고 어디를 가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꽃 한 송이를 볼 때도 탐이 나서 가면 허방에 빠져 넘어지고 다리가 부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남에게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빼앗기는 것을 얻는 것보다 즐거워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와서 빼앗아 가고 행패를 부려도 그들의 요구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송사하여 속옷을 갖고자 하는 이에게는 겉옷까지 주고자 했다. 한번은 그이의 살림살이를 욕심내서 빼앗고자 위조문서를 세우고 위증을 내세워 그의 살림살이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일언반구의 반론이나 변론도 없었다. 그이는 오직 탄식하며 말하길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당도한 것이라했다. 길을 가다가 훼방하는 이가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허락해야 길을 떠났다. 핍박과 능욕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으로 생각했다.

8. 정직과 진실
겉꾸밈이 없었다. 속이고 외식하는 자는 예수와 원수가 된다고 믿었다. 남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것으로 알고 자기밖에는 추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아무리 나환자라도 추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악수하고 반가운 듯하지만 속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오직 진실만을 사랑하였다. “내가 주는 밥은 죄가 안 될 것이다.”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겉으로 주면서 속으로 아까워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안과 밖이 전혀 다름이 없다는 것이 그이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실천하시며 속을 다스리는 것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길이라 믿었다. 남이 나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하며 해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다.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거짓이 나를 해치는 원수라고 알았다.

9.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이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몸도 자기 것이 아니고 마음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주님께 의탁하였다. 밤중이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어디든지 따라 나섰다. 한번은 밤중에 감동이 있어 집을 나가서 십리나 떨어진 마을의 뒷산에서 날이 새기까지 쪼그리고 앉아있다 왔는데 얼마 후 예수의 이름이라고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그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도 그이가 밤새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앞집이었다.
재산도 모두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믿었다. 누가 손해를 끼쳐도 주님께서 알아서 처분하신 걸로 믿었다.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했다. 화초와 꽃나무를 심고 잉어를 기르면서 무척 기뻐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꺾어가고 파가고 잡아가는 것을 보고 인심의 악독함에 한탄하며 울었다.
마음과 뜻을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몰두했다. 목사 장로들이 와서 믿음의 도리나 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없이 기뻐하고 좋아하였지만 말이 희미하게 세상이야기나 쓸데없는 이야기로 되면 같이 담론을 하다가도 낯빛이 침울한 모습이 되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언제나 주님의 도리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았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옮기지도 않았다. 누가 와서 궂은소리를 해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곁에서 말하면 무슨 상관이냐 책망하시며 그저 듣고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면 된다고 하였다.

10. 만물을 한 몸처럼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미물들을 다 사랑하였다. 산길을 가다가 칡넝쿨을 만나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다치지 않게 다 치워주며 걸었다. 풀포기 하나라도 뽑지 않고 마당의 잡초도 뽑지 않았다. 물에 빠진 쥐를 보면 막대기를 놓아서 나오게 해주었다. 하루는 독사가 부엌에 들어와 웅크리고 있으니 부지깽이로 조심스레 몰아서 산으로 내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보였으면 큰일 날 뻔 했으니 앞으로는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루 밤은 어둔 데서 무엇이 그를 물었다. 불을 켜고 보니 큰 지네였다. 조심조심 종이로 싸서 돌 틈으로 돌려보내며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했다간 큰일이 날 터이니 앞으로 다시는 사람들 틈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렀다. 무엇이나 사람을 해치는 것이 나옴은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번은 산이 무너지는 듯한 호랑이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놀랐다. “범이 무슨 짐승이기에 만물의 영장이 되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서 밤새도록 만물의 영장이 네놈에게 져서야 되겠느냐?” 소리를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 보내느라 산을 헤맸다. 사람이 해칠 마음이 없으면 어떤 짐승도 해치지 못하는 법이며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사자라도 사람을 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파리 모기 등 해충이 나오는 것도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 했다. 파리가 생기기 전에 예방할 것이지 파리가 생긴 뒤 죽이려고만 힘쓰지 말 것을 설명하였다. 욕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죄를 짓지 말라 하였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이 욕을 하며 어덕뱅이니 문둥이니 손자놈이니 손가락질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면 죄 된다 웃는 낯으로 타일렀다. 그래도 계속 욕을 하면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나에게 들려주시려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했다. 내 육체에 문둥병은 없지만 어린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안의 문둥병을 가르치신 것으로 알았다. 세상에서 어덕뱅이는 아니지만 날마다 하나님께 빌어먹으니 어덕뱅이도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너그러우며 관대하였고 또한 인자하였다.

11. 찬양과 자비와 기도
그이는 길을 가다가 개미 한 마리만 밟혀도 길을 멈추고 돌아보며 하나님 앞의 행위로 보아서는 내가 너한테 밟혀 죽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네가 나에게 밟혀 고생하는구나!” 하며 슬퍼하였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포기를 보며 기뻐하였고 산에 올라가 우거진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하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 죄인들을 보면 앞에서는 꾸지람을 하지만 뒤돌아서서는 울었다. 한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지면 밤새도록 울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잊지 마소서하고 기도하였다. 해치는 이가 있으면 그이는 이 세상에서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연민을 가졌고 무엇을 훔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는 걸음마다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과 죄인들을 잊지 말아 주옵소서.”하고 기도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였다. 언제나 부지런히 말씀을 전하며 말씀하는 시간에 밥상이 들어와도 공사부터 먼저하고 사사는 뒤로 하자며 말씀을 계속하였다. 마음에 항상 진리의 말씀만을 생각하였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길을 가다가 피곤하여 쓰러져도 하늘만 쳐다보며 우리가 움직이려면 위에서 힘을 주셔야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언제나 욥기를 생각한다고 했다. 야고보서[5:11]에 욥의 말씀이 있어 좋다고 하였다. 병으로 앓는 이를 보아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고 식사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우리가 사는 힘은 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에 있다고 믿었다. 어디를 간다 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길을 떠날 때 기약이 없었다. 사람들이 물으면 모른다. 가다 어찌될 지 오다가 어찌될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맡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이 없었다.

12. 의의 옷을 입자
그는 입은 것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되면 곧 바꿔 입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하루는 새 옷을 입고 나갔다가 어떤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를 보자 곧 바꿔 입고 돌아와서 음식이야 다른데서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거지가 옷을 어디서 얻어 입겠는가.” 하였다.
그이의 모자는 다 쭈그러진 검은색 중절모였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이 모자만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어떤 분이 그 모자를 몰래 아궁이에 불태워버리고 자기의 모자를 드렸더니 좋은 모자는 마음이 불안해서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이는 두루마기는 입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좋아하는 의복은 덕행이었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직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살았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정직의 허리띠를 매고 오직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자 힘썼다.

13. 예수를 잘 믿으려면
그이는 예수를 믿은 후 남들이 자기를 이공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는데 이것은 철저한 자기부정의 정신이었다. 이공李公이 아닌 이공李空으로 자기가 없다는 뜻이다. 하루는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즉석에서 대답하길 빌어먹어라했다.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 오장치 짊어지듯 믿어야 한다.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서 믿어야 된다.”하고 가르쳤다. 개구리가 물에 뛰어들 듯 믿음의 바다에 풍덩 빠지라는 것이다. 그이는 진실로 진리의 바다에 몸을 바쳐 풍덩 빠졌다. 그리고 그가 풍덩 빠질 때 나던 그 소리는 지금도 영원한 울림으로 퍼지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에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14:26-27]

14. 순결생활
남녀의 순결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큰 은혜라고 하였다. 복음을 받은 후 하나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게 되자 부인과는 남매처럼 살았다. 부부관계를 끊고 순결의 삶을 살았다. 나이 어린 아내가 참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아내의 살림도구를 손수 지게에 지고 갖다 주며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다.
그 아내가 얼마 못 가서 되돌아왔을 때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매로 살았다. 아내가 다시 참지 못하고 두 번째 집을 나갔다. 이공은 신령으로 정성으로 기도를 했다. 며칠이고 기도한 후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 아내는 다시는 안 돌아갈 것이라며 온갖 악담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여기를 찾아 왔느냐?” 하면서 물을 끼얹고 야단을 했다.
그이는 심한 냉대를 받았지만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의 간부에 대해서도 선하고 관대한 태도로 대하며 그 여인을 데리고 살아도 유망할 것이 없으니 돌려보내라고 권유했다. 머지않아 그 집에 재앙이 닥쳐 아내는 할 수없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한글도 모르는 아내에게 한글을 깨우쳐주고 성경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찬송을 가르쳤다. 그 아내도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15. 마지막 가는 길 - 고난 받은 종의 노래
그이가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 옴을 알았다. 그리고 세상 떠날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믿는 이들에게 모든 진리를 아낌없이 풀어서 가르쳐 주었다. 모든 재산을 다 나눠주었다. 집도 전답도 다 없이하였다. 곡식 한 톨까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지방에 보일 증거는 다 보였다 생각해서 그 마을을 떠났다. 그를 받아들이고 모셔드리는 데는 세상에서 한 군데도 없었다.
그이는 산으로 들어갔다. 고요히 운명할 장소를 택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보릿가루 콩가루 도토리가루로 연명하면서 분량을 점점 줄여갔다. 마침내 마지막 40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공기로 연명하면서 바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기운이라 했다. 최후 마지막 일주일간은 더없이 장엄하였다. 들어내 갈 수 있도록 손수 나무로 만든 틀, 즉 상여 위에 요를 깔고 누워서 세상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과 육체의 땀나는 고통 속에 일주일을 보냈다. 임종시간이 가까웠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유언을 남겼다. 부인에게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부탁하고 젊은 남녀들에게는 정욕을 극복하라 하고 장년들에게는 가정에 얽매여 진리사랑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라 경계했다. 어떤 이에게는 가시덤불 속에서라도 성경을 볼 것을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양 발과 머리를 붙들라 하였다. “놓치면 죽는다, 단단히 붙잡아서 높이 들라하고 소리를 높였다. 높이 들어올리자 그때 말씀하였다. “누가 나를 받들어 올리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로다.”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제자들은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을 생각하였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52:13-15] --
  
이 현필李 鉉弼 :방림 (1913-1964)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리 주현교회 이 모 씨의 나체 춤 사건을 기억하리라고 본다. 그의 존경하는 인물은 늘 흰 고무신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는 아현동의 김 현봉이라는 목사였다. 그런데 이 김 현봉이라는 목사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맨발의 성자라는 이 현필 이고, 한국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유 영모와 어울리는 사람도 이 현필이였으며,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력을 끼쳐 본을 남긴 사람은 이 세종이라는 분이었다. 이에 이들의 발자취를 두루 살피고 간추려 소개해 보고자 하는 가운데 유 영모에 이어 두 번째로 이 현필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이현필의 생애
청소년 시절
1) 이 현필은 19131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양면 권동(용하리)에서 아버지 이 승노 어머니 김 오산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위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27세때 막동이로 이 현필을 낳았다. 이 현필은 막동이어서 일곱 살이 되기까지 어머니 젖에 매달려 귀찮게 굴었는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싹뿌리이었다고 한다.
그는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 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보통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이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졸업했다. 이곳에 천태산 혹은 개천산 이라고 하는 명산이 있는데 한국 교계에 특이한 두 인물이 나왔다. 한분은 이 현필의 스승이던
이 세종 이고, 또 하나는 이 세종의 제자 이 현필 이다. 이 두 사람은 나주군 방산에 있는 자그마한 방산장로교회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7)

이 세종을 만나다
2) 이 세종은 예수 믿기 전, 나이 40세 되기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로 살면서 푼푼이 모은 재산으로 논밭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 나이 40세에 예수를 믿게 되면서 너무도 기뻐서 매일 밤낮으로 성경연구와 암송으로 세월을 보내고 집집에 전도하는 일을 힘썼다. 그가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리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도 인사도 받지 않았다.
성경 공부를 다 마친 뒤에야 인사를 했고, 식사도 공부가 다 끝난 뒤에야 들었다. 예수를 믿고는 모든 일을 성경 말씀대로 실천했다. 자기에게 빛을 진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다 모조리 탕감해 주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 질러 버렸다. 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나눠주고 부부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쑥을 뜯어 밀가루에 반죽해 먹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3) 이 세종의 자비심은 금수. 곤충. 초목까지 아꼈다. 자기 발밑에 개미가 밟혀 죽는 것을 보고는 서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이 세종의 말년에는 산중에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정도의 것이었다. 방문은 성경대로 아주 기어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세상 떠날 때는 제자들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여 그 위에 누워 그대로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곁에서 울고 있는 아내 보고는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 하면서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세 마디소리를 크게 질렀다.(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두섭 저. 소망사 간. p.185-186)

4) 이 현필이 신 생활에 나선 시기는 8.15해방 10년 전이 되는 22세 때로 잡는데 그가 예수를 믿더라도 그 생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전남 화순군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 세종을 만난 뒤 부터였다. 그가 예수를 믿고 다도면에 유일한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던 때 인접 이웃 도암면 등광리 뒷산인 천태산 기슭에 산당을 짓고 도를 닦으면서 가끔 방산교회를 드나드는 이 세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종은 도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선 못쓴다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 세종을 보통 이공(李空)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빈 껍질이라는 의미의 이공(李空) 이라는 말이다.
사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것도 없는 빈 털털이였다. 밥도 땅바닥에다 놓고 먹고 살았다. 또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문 순희 라고도 부름)를 누이라고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고 일본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을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의 산당은 등광리 마을에서 가까운 곳인데 사방에서 모여온 젊은 처녀 총각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 현필도 그 무렵 이 속에 끼었다. 이공의 성경공부는 영해 방법이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담화식 이었다.
이때에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토론한 사람들은 광주에서 찾아오는 최 흥종, 강순명, 목사들과 홍종우 장로, 백 영흠 전도사들과 임 완식 오 복희 전도사 이 현필 등이 있었다. (이 세종에 대해서는 현대종교 1992/23월호, 거룩한 혈맥을 찾아서 - 윤 남하 글 참조)

5) 이공과 이 현필의 연령 차이는 30년 차이다. 이 현필이 이 세종을 만나 처음 대립한 논쟁 중심 문제는 이공의 순결 사상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육신으로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혼생활까지도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의 순결사상은 그대로 이 현필에게도 전수되었다.
이런 영향으로 광주 YMCA 안에는 강 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10여명이 주요멤버가 되어 독신 전도단이란 것이 조직되기도 했는데, 그 멤버들은 강 순명, 이 준묵, 차 남진, 운 남하, 고 영노, 박 철웅 등이었다. 이와 같은 독신 전도단은 원래 전주 배 은희 목사가 시작했고 강 순명 목사는 그 연줄로 광주에서 이 운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성년이 되어
6) 이 현필이 예수를 믿고 등광리 이공(李空, 이 세종)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다. 이 현필이 차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 다도면 면서기 시험에 그 형님과 함께 합격을 했으나 이 현필은 그만 두고 형은 다도면 면장까지 지냈다.
21세 때 이 현필은 광주재매교회 전도사 일을 보기도 했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때는 서울에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기는 했다. 그때 서울에서 만난 원 경선하고 평생 친구로 사귀었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에서 특이한 목회를 하던 소위 기둥교회 누더기 교회(아현교회)의 김 현봉 목사를 만났다.

7) 이 현필은 스승 이 세종을 배신하듯 23세 때 결혼 하고야 말았다. 아내는 황 종원 씨로 광주의 좋은 가문의 딸이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동거 2년도 채 못 되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 부터 아내를 보고 매씨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스승 이 세종 역시 그런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세종은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따라가 날라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 주고 남매 사이로 살았다. 그러나 이 현필의 부인은 남편을 놓지 않으려고 몹시도 애를 많이 썼으나 끝내는 한 동안 여순경 노릇을 하다가 다른데로 개가해 소생 없이 살았고, 비록 개가는 했으나 이현필의 인격만은 존경하고 그를 변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순결 사상은 본래 이공(이 세종)의 사상이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7)

이 현필의 특이한 생활
8) 이 세종의 문하생인 이 현필 나이 30세 전후 주로 산에 은거 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에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 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훈련 시켰다. 일종의 수도생활이다. 이곳 서리내란 선인래(仙人來)에서 나온 듯 하다. 지금도 이곳에는 화전민들이 여러 세대 살고 있지만 이곳은 이 현필 운동의 발상지이다.
해방 이듬해(1946년 이 현필의 나이 33) 그때부터 이 현필은 특별한 소명을 느껴 아직 10대의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을 거느리고 서리내로 데리고 들어와 수도를 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이 현필에 감동되어 부모님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현필을 따라 다닌다고 집에서 쫏겨난자 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찬송을 부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기간은 15일 이었다. 보름 훈련하고 쉬었다가 또 보름을 훈련했다. 그들은 숙식을 하기 위해 이곳에 움막을 지었다.
이곳에서의 음식은 쌀가루에다가 물을 타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며칠씩 굶고 지냈다. 소녀들도 하루에 한 끼씩 먹었고 주로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고, 신발은 짚신을 삼아 신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며 초기 수도를 했던 사람은 소녀 7명이었다.
서리내 앞산을 타고 남원읍 쪽으로 20리나 내려오노라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 있다. 이 갈보리는 본래 이 현필을 따라나선 김 금남 양 모녀의 숙부 되는 분의 농장이었다. 숙부는 초등학교 교장이면서 이곳에 농장을 장만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파고, 밤나무, 감나무, 대나무 등을 울창하게 심고 논을 만들고 아늑한 한편 구석에 농막 한 채를 지어 놓았다.
김 금남 모친이 먼저 이 현필을 따라 나서고 그 후에 김 금남 양이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100일 기도를 하고 지내던 집이다. 이런 연고로 이 현필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부터 이곳은 서리내와 함께 이 현필 운동의 발상지였다. 이 현필 운동의 초기에는 김 금남 양 일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 금남 양의 모친인 강 남순 씨를 <갈보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9) 이 현필의 타고난 성격에는 남보다 독특한 점이 많았다. 제자들은 그의 눈물을 잘 볼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천재보다 꾸준하고 피나는 노력이 그의 인격을 이루었다. 자기완성은 그의 일생의 목표였다. 옳다는 일에는 지체 않고 곧 실천하는 불타는 사나이, 신앙적인 정열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었으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의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 번 대한 남녀는 주저 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착착 버리고 그의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그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는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도 그 말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성경을 강의할 때에는 숨소리도 죽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을 하다가도 힘이 나면 벌떡 일어서서 정열적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못 잊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0) 한동안 기성교회에서는 이 현필 운동자들을산중파라고 불렀고,‘이단이라고 선전했다.“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파괴하고 재산을 거의 다 바치고 이나 빈대를 잡아서는 죽이지 않고 성냥갑에 담아 물에 떠내려 보낸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도랑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보면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도로 물에 방생한다. 빌어먹고 다니고 그들은 찬송도 부를지 않고 기성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고 악평을 했다.
1948년 이 현필의 일행이 해남에 처음으로 전도대로 나갔을 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헌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깡통을 들고 맨발벗고 갔었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믿는 군수 부인 등이 나와 천사 처럼 그들을 영접했다. 그는 멸시와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이 현필은 늘 하는 대로 거리 가운데로 지날 때는 신을 신고 그 거리 밖을 벗어나서는 신을 아끼느라고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두 자매들도 스승이 하는 대로 추운 겨울날이지만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1) 벽제 수녀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둔 관 한 개가 있어 이 현필이 운명하면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 현필은 유언하면서 자기 시신에 관을 쓰지 말라 하고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때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했다. 무덤은 평토장으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필경은 임종이 왔다.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보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때가 19643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그 전날 예고한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때 이 현필의 나이 53세였다.

주변 인물들
12) 수레기 어머니- 이 세종이 자기 후계자 격으로 두 사람을 지목 했는데 하나는 남자로 이 현필이요 도 하나는 여자로 수레기 어머니였다. 그의 본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가 살던 고향 이름을 따라서 수레기라 불렀다. 그는 이 세종의 교훈을 몹시 사모했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했으며, 그의 신앙은 아주 개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고지식한 데가 있다. 6. 25때 피난 다니다가 실수하여 다리가 부러졌지만 헝겊으로 그냥 되는대로 잡아매고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뼈가 굳어 버렸다.
이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이 현필을 그대로 따랐는데 정 한나 집사와 정 귀주씨와 함께 동광원의 3 여걸이다. 남의 본이 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수레기 어머니는 나주시 방산 뒤로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강을 건너는 돌 징검다리를 장마 뒤에 건너다가 급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때 찾은 시체는 상처가 없었으나 1970년 아들 사무엘에 의해 동광원 농장 옆에 매장됐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72-74.)

13) 현 동완- 서울 종로 YMCA 의 총무로 활약하던 현 동완 선생은, 유 영모 선생을 몹시 존경하며 서로 손잡고 마치 다정한 애인들처럼 서로 따라 다녔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의견차이로 격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 총무는 유 영모 선생에게 공자 맹자 소리보다 성경을 더 읽으라고 하며 성경을 연구해서 강해하라고 우정 있는 솔직한 충고를 했다.
현 동완 총무와 같은 그룹의 사람으로 전남 장성군 소록리에 사는 신공이란 분은 자기가 살아온 날 수를 매일 계수해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유 영모 선생도 어느 해 어느 달 며칟날을 쓰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총 달수만을 총 계산해 갔다. 현동환도 그러했다.
시편 9012절에우리에게 우리 날수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하신대로였다. 현 동완 총무가 유영모와 함께 광주에 와서 처음으로 이 현필을 만나 그 소감을 말하기를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와서 보니 반쪽이 있었구나!” 고 독특한 풍자로 말했다. 유 영모를 처음으로 동광원에 소개한 분은 현 동완 총무였다. (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86-88)

14) 유 영모-유 영모 와 이 현필 그리고 동광원과의 관계는 꾸준히 계속된 오랜 관계였다. 유 영모는 정주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유명한 한학자요, 많은 제자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사상을 본받은 사람들이 많다. 함 석헌도 유 영모의 제자다. 유 영모는 16세 때 입교하여 그때 산 성경책을 70년 가까이 종이 한 장 떨어지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
본래는 하루 두 번 식사하다가 1952214일부터 하루 한끼씩을 먹었다. 일식주의자로 수십년간 하루 한끼씩 먹되 저녁때에 먹고 어디를 가나 두발로 걸어 다녔는데 고집이 대단하여 삼각산 자택에서 서울 종로까지 늘 걸어 다녔다.
동광원이 해마다 총회로 모일 때면 유 영모가 와서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공자 석가를 높이는 일이나, 기성교인들 처럼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못된다고 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상이 깊어 이해가 어려워서 선생들이나 모아 놓고 할 강의다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 현필은 유영모를 평하기를 한마디 피투성이다.” 고 했다. 유영모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이 현필 이였다.
동정 사상(童貞. 純潔)에 있어서도 유 영모의 주장은 이 현필에게 만족했다. 이 현필이 존경한 사람은 현 동완. 김 상돈. 등 여러분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 영모를 가장 존경했다.
나이 80이 넘은 몸으로 유 영모는 이 현필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광주에서의 동광원 모임에 내려와 청년같이 유쾌하며 씩씩하게 종일 꿋꿋이 앉아 가르쳤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89-90. 유 영모의 생애와 사상은 현대종교2004/7월호 9월호를 참조.)

15) 강 순명- 강 순명 목사가 광주 YMCA 안에서독신 전도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특별한 이상 밑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 그 단원으로 강 목사의 지도를 받던 분들 중에는 이 준묵, 차 남진, 윤 남하, 고 영노, 박 철웅, 이 현필도 끼어 있었다.
강 순명 목사와 이 현필 선생 사이는 하라! 그랬네!” 하는 사제지간의 사이였다. 이 현필은 강목사에게 성경을 공부했다. 강 순명 목사는 마음이 착하고 자비한 분이었고 바로 살아보려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자 타입의 인물이다.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일제 말에는 강 순명, 정 진철(후에 목사) 여자 두 명등 5, 6명이 소위칼갈이 대를 조직해 가지고 전국으로 전도를 다니며 집집으로면도 칼 갈으시오라고 소리치고 다녀 칼을 갈아서 번 돈으로 구제 사업을 했다.
이뿐 아니라 거리 청소, 남의 집 변소 청소 등을 하였다. 임종할 때 머리맡에 우는 딸을 보고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라고 타이르면서 숨을 거두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저. 은성간.
1992.p.90-92)

16) 정 인세- 정 인세가 이 현필을 알게 된 것은 8.15 해방 전부터이다. 정 선생의 나이 23세 때 한 체조 지도교사로 초청되어 광주 Y에서 실수학교의 사감노릇을 하였을 때 독신 전도단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다. 정 인세 총무는 신학교에도 다녔으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한때 이곳 저곳 여러 교회를 목회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목포에 있던 윤 치호에 의해서 광주에 세워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부임 전 정 인세는 양복에 새파란 넥타이 매고 다니던 그가 넥타이도 양복도 벗어 버리고 삭발하고 과거의 모든 사진과 책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는 내 자식이라 해서 남보다 더 특전을 베풀지 않았다. 더 뒷바라지 해주는 일도 없었고 더 공부시켜 주는 일도 없었다. 똑같이 다루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원장님이라고 불렀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92-102)

2. 이 현필의 사상
17) 이 현필 운동이 한창 불타던 때 광주 지산동 집회소에서는 40일 동안이나 십자가의 사랑과 겸손에 대하여 성경을 들고 목이 쉬도록 가르쳤는데 그때 福音三德을 가르쳤다. 삼덕이란 순결, 청빈, 순명이다. 순결은 생명과 같다고 가르치고 나 하나의 인격 완성이 가장 귀한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186)

18) 이 현필의 고신극기(苦身克己), 그의 기도등 특이한 생활은 남들이 도저히 다를 수 없었고 그분의 말씀은 하루 종일 한 이야기를 녹음 한다 해도 모조리 성경 중심 설교요, 사람들의 영혼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누구를 명령해서 무슨 일을 시키는 일이 없었다.
혹시 책망하는 일은 있어도 대개 겸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가 제자들에게 정신을 넣어 주려고 교육과 훈련을 시킬 때에는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한 생활을 훈련시킬 때에는 비누를 쓰지 말고 아궁이 잿물로 빨래하고 털옷을 입지말자. 자기 입을 옷은 자기가 손수 베를 짜 입자.” 하며 그는 일생동안 모직물은 입지 않고 살았으며 홈스펀 짜는 기계를 사서 굵은 무명베를 짜게 하기도 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19) 이 현필 자신은 일식주의 이었다. 여러 해를 하루 한 끼만 먹되 꼭 저녁때만 먹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가 많고, 며칠에 한 번씩 미숫가루로 때우는 때가 많았으며, 생식으로 오이, 살 가루, 물로 끼니를 때웠다.
이 현필의 유언이라고도 말하는 <한 숟갈 덜 먹기 운동>밥 한 끼에 1원 모아서 불쌍한 형제들을 도웁시다(이것을 한 달 계산하여 회비로 월 60원에서 최하 월 30원 모으는 운동). 내 몸이 세상 떠날 때 장례비로 1원도 들이지 말고 속옷 내복 한 벌만 입혀서 조용히 묻어 주시오(이것은 그의 유언이었고 그가 계명 산에서 세상 떠날 때 그렇게 했다.) 의심 말고 믿읍시다. 하나님께서 내 형편 잘 아십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28- 68)

20) 고아들을 위한 동광 원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 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 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 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 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누구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119)

21) 당시 여순 반란의 피는 이미 이 땅의 남단을 붉게 물들이고 앞으로 곧 얼마 뒤에 6.25 난리가 또 북녘으로부터 터지려고 하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이 현필은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구일원에 대한 구상이 태동하고 있었다. 환난이 온다. 올데갈데없는 사람들 단 하룻밤도 함께 지내줄 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의지 없는 그들을 구원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하룻밤 재워 보내기 운동이었고, 후에 이 현필 만년에 일으킨 일작(一勺)운동의 구상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일작 운동은 이 현필이 1964년에 세상 떠나던 해에 마지막 길로 서울 계명 산으로 가면서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총회 때에 제안한 운동이다. 그것은 모두가 매일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자는 운동이다. 이렇게 실시해서 30명이 밥 한상이 되고 300, 3천명으로 늘어나면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비행기가 된다. 그렇게만 되면 자주 국가가 되고 세계는 평화가 온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간단한 선행, 소자에게 물 한잔 떠주는 일 같은 선행. “일작씩 거둬 귀일원에 !” “의지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 돈으로 십 원 운동누구나 돈 쓸때 십 원 덜 쓰고 그것을 모아 불행한 겨레들을 재워 보내고 돕자고 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p123)

3. 이현필과 동광원(귀일원)
22) 동광원이 생긴 것은 6.25 반년전 여순사건 직후 광주에서 생겼다. 여순 사건은 쇼크가 컸고 피해가 심해서 부모 잃은 고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목포에서 고아원을 크게 하고 있던 윤 치호씨가 광주 YMCA로 정인세 총무를 찾아와서 정 총무 이러고 있을 때요? 지금 고아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
그래서 윤 치호 씨와 정 인세 총무의 주동으로 광주를 중심해서 저명인사 70명이나 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고 발기 위원회를 조직하여 고아원 운동을 벌였는데 이름을 동광원이라 지었다.(맨발의 성자엄 두섭저.은성 간. 1992.p.95) 한편 이 현필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받은 그의 새 운동의 이름은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동광원귀일원은 한 단체 이면서 두 가지 이름이다. 지금도 공식 이름은 귀일원이다. 정인세 총무가 원장이된 고아사업 동광원운동을 이 현필과 손잡고 했고 실제 동광원안의 모든 책임이나 실무 활동은 이 현필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나서서 해왔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동광원이라면 곧 이 현필의 운동 단체로 알고 있다. 정 인세와 이 현필은 절친한 런닝 메이트로서 좋은 콤비였다. 그러니 귀일원이 곧동광원이고 동광원귀일원이다.

23) 동광원은 처음에는 고아 사업을 위해 시작된 단체이었지만 이렇게 어느새 수도 단체로 변해 버렸고 지금은 고아사업은 그만두고 순수 수도단체로 나간다. 현재(1990) 동광원에서 수도하는 식구들은 전국에 이백명 가량이 된다. 광주 방림에 본원을 두고 분원은 전남의 곡성, 함평, 진도, 도암, 전북에 남원, 전주, 광주자매, 무등산 등지에 크고 작은 그 단체가 있고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월에도 있다. 혹은 십여 명, 혹은 수십 명씩 모여 살며 관상수도 보다도 노동수도를 주력하며 자급자족하는 농사에 힘쓰고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조도 받지 않는다. 자활 생계를 철저히 세우고 있다.

24) 이 현필 운동이 확대되면서 기성 기독교 안에서는 이해나 동정보다 냉대를 받았다. 그들은 기성교회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고 금욕주의적 이어서 엄격한 독신생활로 동정을 지키며 가정생활을 죄악시 하여 동광원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가정생활이 파괴되며 거지같이 옷을 허술히 입고 맨발 벗고 걸식 탁발도 하고 산중에 살기가 일쑤이고 해서 이 운동 초기에는산중파’‘금욕주의자’‘이 현필파라 불러 지방교회나 노회목사들은 이단자들 같이 여겼다. (맨발의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p.96-98)

25) 이 현필을 따르던 여자들 중에는 훌륭한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정 한나 같은 분은 이 현필이 세상을 떠난 뒤 이 현필의 정신을 따라 수녀들을 지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젊어서 지금까지 일생을 운동에 바친 정 한나. 정 규주 등은 본래 기성교회에서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이었으나 이공(이세종)의 제자 박 모 씨를 따르다가 이 현필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 불만스러워 이 현필을 찾아 만나보고 그만 감화를 받아 그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32-133)

26) 정 한나 집사는 그 후 경기도 능곡에 가 있다가 1957년 서울 Y의 현 동완 총무의 이야기와 이 현필의 암시를 받고 혼자 경기도 벽제군 계명 산 앵무봉 밑에 있는 현 총무 수양관이 있는 산중으로 분원을 개척하러 들어갔다. 이것이 후에 벽제 수녀의 마을이다. 이 현필은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말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배우게 했다. 정 한나를 비롯해서 현재도 이 단체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지도자들은 몸소 실천하는 데서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얻었다.
전남 함평에도 만여 평의 농장이 있고, 진도 섬에도 만여 평 넓은 논밭이 있고 그밖에 경기도 벽제 계명산, 나주시 다도면 중촌 등지에 동광원 수녀들은 흩어져 살며 묵묵히 땅을 판다. 지금도 그들은 효소법 개량농사를 실시하여 농약을 안 쓰고 수확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 벽제군 계명산 분원에는 홈스펀 짜는 베틀을 여러 대 두고 수녀 중 일부는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하고 더러는 베를 짜서 굵은 무명베를 서울에 가져다가 팔았다.
이 베를 사서 옷을 해 입은 이들은 서울에서도 검소하기로 소문난 김 현봉 목사의 아현교회 교인들이었다. 그 교인들은 모두 굵은 무명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해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동광원의 특색은 수녀들이 농사를 짓느라고 아주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165-166)

4. 파 계
27) 이 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 병으로 무척 고생했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과거에는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금욕 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기주장을 끝까지 고집하지 아니하고 대오 각성하고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고발한 점이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고 느낍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자기 근본 신앙을 분명히 천명하므로 제자들의 오해나 잘못 나감을 미연에 예방한 것이다. “나는 위선자 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이 현필이 지금 신촌 거지 굴속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누운 채 엄숙히 자기를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부질없는 이 현필 관()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28) 사경을 헤매는 이 현필은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제자가 쓰레기통을 뒤져 굴비를 가져다가 머리맡에 놓았더니 그 국물을 입에 떠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젊어서 지금까지 멸치 꼬랑지 한 마리도 입에 대어본 일이 없는 철저한 채식주의자, 금욕주의자요 옷에 이가 굴러도 D.D.T 약을 단 한번 사준 적이 있을 뿐이다. 수도사가 동정을 버리는 일과 고기를 먹는 일은 죄라고 까지 생각했던 그가 지금 고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일부러 파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김 한나라는 수녀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 현필이 고기 국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는 조심스레 김 준호 옆에 와서 선생님이 지금 시험에 들었는지 모르니 고기국물을 절대로 넣어드려선 안 된다.”고 심각한 태도로 제지 시키려 했다. 그때 이 현필은 당신이 하나님이오?” 하며 책망을 했다.
정 인세 총무가 오자 이 현필은 필담으로이 개 같은 것을 보려고 왔습니까? 원장님, 제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동광원에서 나를 책벌해 주십시오.”그는 자기 스스로 파계하고는 스스로 자기를 자조했다.

29) 이와 같은 이 현필의 파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평했다. 어떤 이는 이 현필이 이런 파계로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공든 탑을 혁명 하노라 한 일은 그가 걸어온 반생의 주의 주장이 미완성극이라 평했다. 김 준호는동광원의 타락은 약 쓰고 고기 먹게 된 일이다.”고 했다.
저녁 무렵, 해는 서산마루에 뉘엿거리는데 석양이 쓸쓸히 비추는 한 그루 밤나무 밑에 펴놓은 거적때기 위에 다 죽은 송장같이 뻗뻗이 누운 이 현필의 모습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제 와서는 스스로 그 자신이 평생 소중히 다듬고 지켜온 길마저 파계한 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주의 주장마저 부인하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마저 멸시받고 죽어가는 이 현필이었다.
이 현필은나는 고기를 먹고 약을 썼으나 그러나 나는 고기 안 먹고 약을 쓰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의 그런 신앙도 존경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것은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얻는다. 약도 안 먹고 살생도 않는 사람들도 자기주의대로 그대로 안 먹어도 좋으나 먹는 사람도 안 먹는 사람도 서로 남의 인격과 신앙을 존경하라.” 고 했다.

30) 고아들을 위한 동광이 시작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한번은 Y총무로 있으면서 동광은 운영을 맡고 있는 정 인세 총무가 벙어리 도를 닦고 있는 이 현필의 산막을 찾았다. 고요한 호롱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종이에 필담을 나누었다.
이 현필은 금식기도 중에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라고 썼다. 그리고 정 인세에게 필담으로 권하기를 곧 나가셔서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동광원 운동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동광원 사람만 말고 눅나 역에 나가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곧 시행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귀일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맨발의 성자엄두섭 저. 은성 간.
1992.p.401-422)

나가는 말
이상에서 주목받는 유 영모에 이어 이 현필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기성교회로 부터 비난받는 요소가 무엇인지도 다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역자들이 성공적인 목회를 통해서 대형교회를 꿈꾸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마음자세 만은 우러러 봐야할 마음자세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우리 자신이 죽는다면 위에 열거한 주목받는 인물들처럼 우리를 존경하고 유업을 기리며 따라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를

참고도서: 1. 한국의 신흥 종교』Ⅲ. 탁 명환 저. 1974. p385 - 391
             2. 좁은 길로 간 사람들엄 두섭 편. 소망사 간. 1985. p.185-190
             3.  엄 두섭 저 은성 간. 1989. p.103 - 164
             4.맨발의 성자 이 현필엄 두섭 저. 은성 간. 1992.
             5.호세아 닮은 성자엄 두섭 저. 은성 간. 1987.
             6.순결의길. 초월의 길엄 두섭 저.
             7. <김 현봉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 정 봉기 장로회신학대학 2001 석사논문.
             8. <현대종교> 1991. 10월 김 현봉 이야기. p.68 - 82
             9. <현대종교> 1991. 11월 김 현봉 이야기. p. 188 - 197(김 현봉사진)
             10.<현대종교> 1992. 01월 김 현봉 이야기. p. 196 - 212
             11. <현대종교> 1992. 02월 이 세종 이야기. p. 46 - 57(이 세종의 천태수양관)
             12. <현대종교> 1992. 03월 이 세종 이야기. p. 26 - 34(등광리 교회사진)
             13. <현대종교> 1992. 04월 이 세종 이야기. p. 26 - 40
    
김 현봉 목사(18841965) /윤 사무엘 교수 (엄 두섭, 기독교 영성의 흐름,  
서울:은성, 1998, 230-232; 정 봉기,
"신앙양심의 회복, 김 현봉기독교 사상, 200012월 호, 27-38.)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 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별세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우리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
.1905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조국을 위해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 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3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 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 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김 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 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 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 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 병규(신촌), 백 영희(부산 서부교회), 안 병모, 이 한영, 안 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 길옹목사(2001년 현재, 85)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그의 아들인 안 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 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한 정보는 임 형태 목사(콜로라도 스프링스한인장로교회)께서 제공해 주셨다.김 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1965312일 오전 95081세의 일기로 김 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 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 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중목사김 현봉
서울 마포구 아현2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 초 까지만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현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는 김 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기에 중목사로 불렸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 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김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전도사로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를 만나러 창광교회를 찾았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곤 했다. 김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 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면서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회개해 양심을 찾아 자신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누구를 바로 서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곤 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됐던 그는 석방된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를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것은 48살 때인 32년이었다. 아현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김 목사가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김 목사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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