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의 하나님 여호와(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성경말씀 누가복음 11장 27-36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악한 시대에 보일 마지막 표적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등불의 비유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찬송가 453장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나의 이적은 제가 어린 시절 여름성경학교에서 그림동화로 발표를 했던 내용입니다. 그 시절에는 그야말로 동화처럼 재잘거리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요나는 누구이고, 니느웨는 어디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요나서의 배경과 무대니느웨는 사마리아에서 북동쪽으로 750여㎞ 떨어진 곳으로 티그리스 강가에 세워진 고대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는 원수지간이었으며, 패전국이나 포로에게는 잔인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스라엘에서 무려 3200여㎞나 떨어진 지중해 끝(서편)의 다시스로 가는 무역선에 올랐던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께 이끄심에 따라 사흘간 죽었다 살아나 회개를 외친 백성은 이스라엘민족이 아니라 이방민족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이었고, 그들은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여호와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것처럼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에도 여호와를 경외한 사람들이 여러명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욥이라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우상장사의 아들 아브라함은 소가 고삐에 매여 끌려가듯 억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의 한 점을 찍게 되지만, 욥은 마귀의 시험대상이 될 만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는 동방출신이었습니다. 그 외에 욥의 세 친구들이나 엘리후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성경기록에 명백한 사실입니다.
또한 욥과 동시대에 살았던 멜기세덱 왕겸 제사장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떡과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 히브리서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Question
사람들이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어떤 점이 같은 지 모르겠습니다. 알기 쉽게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nswer
* 멜기세덱과 그리스도(7:1-10)
1. 의의 왕, 평강의 왕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한 후에, (창 14:17-20)을 인용해서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 멜기세덱은 1) 살렘(예루살렘) 왕이었습니다.
'멜기'는 '나의 왕'을 의미하고 '체데크'는 '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체덱의 이름은 '나의 왕은 의롭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화의 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름 역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참된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오셨으며, 또한 참된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사 9:7; 11:1-5, 마 11:28).
2. 왕과 제사장을 겸직함
또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정(祭政) 일치의 고대 사회에서는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3. 영원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은 아비나 어미, 또는 족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3). 일반적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중요한 사람은 반드시 그 족보를 자세히 밝혀서 그 근거를 소개했습니다. 특히 왕과 같은 사람은 반드시 그 족보를 제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부모나 후손에 대한 족보를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는 것은, 그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후손과 같은 혈통을 따라 계승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히 5:5-6). 또한 멜기세덱은 태어난 날이나 죽은 날에 대한 언급도 없고, 하나님 아들과 같이 항상 제사장으로 남이 있습니다(3).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실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유사하다'라는 말이며, 이는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시110:5).
4.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림
또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히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멜기세덱은 믿음의 조사인 아브라함보다 탁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머리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5. 레위 자손이 아닌 특별한 케이스로 제사장이 되심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였습니다(14). 원래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고, 유다 지파에 속하는 것은 주님의 대제사장직이 혈통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율법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시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법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16). 그리스도는 레위 계통의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지않고,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레위 지파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었던 멜기세덱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될 것이라!"(17, 시 110:4).
그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으로서 칭조주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을 더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애굽왕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맡긴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입니다.(개인적으로 총리대신을 지낸 사람의 가족들이 어떻게 종의 지위로 떨어져 출애굽을 하게 되는지 의문이 있습니다.)
②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
두로와 시돈에 살던 이방여인 사르밧 과부는 [왕상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말에 이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함으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③엘리사 시대의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 (누가복음 4장 27절)
④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⑤ 룻기의 주인공인 모압여자 ‘룻’
⑥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의 미움을 받아서 진흙구덩이에 빠졌을 때 예레미야를 구출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놀랍게도 이방인 ‘에벳멜렉’이라는 구스(이디오피아)사람입니다
⑦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메데왕 다리우스
⑧ 다윗시대에 활동했던 우리아장군 아시죠?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는 유대인이 아니고 헷(힛타이트)사람입니다
철기문화가 꽃피웠던 헷사람 인데 그렇게 충직한 장군이 유대인이 아니고 헷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⑨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찾아왔던 스바여왕 (에티오디피아(구스)의 여왕)
⑩ 솔로몬 성전을 건축 할 때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 두로(오늘날 레바논)왕 ‘히람’입니다
⑪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하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겠다고 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열두제자도 아닌 구레네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구레네는 리비아의 트리폴리 부근이고, 그 아내와 아들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⑫ 10명의 나환자를 고쳐주었는데 감사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1명 뿐 이였다는 이야기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⑬ 강도만난 자의 이웃 사마리아인
⑭동상박사 세사람
⑮ 백부장 고넬료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 감탄하셨던 백부장 고넬료도 이방나라 사람입니다
⑯구스(에디오피아)의 내시 :이사야서를 소리내어 읽고 있었지요.
성경지식이 짧은 저로서는 인터넷을 뒤져보고 성경을 찾아보며 이방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민족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잘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 유일하신 창조주이시지요.
그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구약시절이나 신약시절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이 되는 요나의 기적에 앞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칠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마15:29-39)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같은 듯 하지만 사뭇 다른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당시 예수님의 행로를 살펴보면(마가복음 7장 31절 예수께서 당시 두로지방애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스에 이르시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셔서 전도사역을 하시는 중에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의 사건이 있었고, 그 일 후에 지중해 연안의 이방지역인 두로에서 북쪽의 시돈으로 올라가십니다.
북쪽으로 가셨다가 갈릴리 서쪽 유대 땅으로 내려오신 게 아니라 갈릴리 동편 이방지역으로 빠져나가십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데가볼리라고 나오는 지역에서 오늘의 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데가볼리라는 지역은 갈릴리 남동쪽에 있는 도시인데 열 개의 자유도시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큰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이 사역을 계속 하셨는데, 이 7병2어의 기적도 그곳에서 일어났고, 바로 앞부분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몰려오는데 그 사람들의 병과 장애를 다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지역에서 이런 일들을 하시는데, 지금 마태복음이 이걸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14장과 비교했을 때, 유대 땅에서 행하셨던 전도사역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실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 두로와 시돈으로 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때가 다 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잔디에 앉히셨다’고 얘기하는데, 잔디나 풀이 땅에서 나는 것은 유대지역에서는 봄철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7병2어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면밀히 이야기 해보면, 적어도 ‘땅에 앉았다’는 얘기는 땅의 풀들이 다 말랐을 때이고 봄이 지나 여름으로 바뀌었거나 그 이후에 어느 정도 기간이 흘러갔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짧게는 한 계절이 바뀐 것이고, 길게는 5,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흐르도록 이방지역에 계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 왜 주님께서 이방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유대 땅에서 행하신 것과 똑같은 역사를 이방사람들에게 계속 하셨을까?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가운데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오심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 외의 다른 사람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전이나 창조후나,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며, 오로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함께하지요.
하나님 나라에는 계급도 없고, 종과 주인도 없고, 네것 내것도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지체만 있을 뿐이라고 믿습니다.
전임 사역자들에게 “주의 종”이라 칭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교황이 가장 낮은 종이라 칭한다지요. 하나님나라에서는 다 같은 지체일뿐인데, 뭔가 구별되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길 원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 사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이방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대개 유대인이 아닌 사람(non-Jew)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는데,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구분한 다음, 비유대인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거부감이 듭니다.
이런 단어 하나하나로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갈등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데, 원래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있을까요?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찾으면 stranger, alien, foreigner, outsider 등이 나옵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gentile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은 outsider와 같이 외부의 사람을 뜻하는 단어와는 다르다는 말이죠.
성경의 이방인, 혹은 gentile은 히브리어 גוי [goy] נכרי [nokhri] 의 단어로, 그 뜻은 peoples(민족들), nations(열방)입니다.
비유대인(non-Israelite)과는 다소 구분이 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문맥상 비유대인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참조하면서 성경을 읽는다면 좀 더 바른 시각으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뜨노스] 인데, 그 단어가 전부 중성복수로 쓰였어요.
남성이나 여성도 아니고 중성 복수예요.
그러니까 그 단어는 이방인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이방적인 것' 이라고 번역해야 돼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방적인 것, 이스라엘 안에 들어 있어도 이방적인 것을 갖고 있는 자, 그것으로 말씀을 대하는 자들은 전부 이방인이에요.
[에뜨노스]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호코스모스의 세상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말씀을 진리로 듣지 못하고, 나타난 표, 그 표의 수준, 껍데기의 수준으로만 보는 것을 총칭하는 것, 곧 그 율법의 세상, 이것이 이방적인 것 [에뜨노스]예요.
…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호코스모스적 모습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 설 수 있었던 거예요.
당신 죽으면 안 된다고 야단쳤다니까요.
질책했단 말이에요.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그래요.
이방인.
- 김성수 목사님 -
147. 에드노스(ἔθνος) : 이방인 (nation people)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이방인’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드노스’(ἔθνος)는 ‘(관습이나 관례에 의해) 익숙하다, 습관이 되다, 풍습이 되다, 익숙한 것, 관례, 관습’의 뜻을 가진 ‘에도’(ἔθω)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같은 습관을 가진) 민족 또는 지파’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집단, 무리, 떼, 인류, 민족, 국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유대인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유대인이 아닌) 외국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방인, 이교도, 이방나라’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 ‘(은유적으로) 비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고 말하면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ἔθνος)이 구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마6:32).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ἔθνος)이란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ἔθνος) 즉,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의 나라인 세상 나라 백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땅의 것을 구하는 자를 가리켜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고 말하면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이 세상 나라의 이방인(ἔθνος)인 사도바울은 ‘내가 이방인(ἔθνος)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ἔθνος)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은 이방(ἔθνος)을 비추는 빛이요, 진정한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영광(눅2:32)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ἔθνος)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ἔθνος)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ἔθνος)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0-52)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ἔθνος)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갈6:14) 곧 사망을 통과하여 생명으로 옮겨진 자(요5:24)이기에 이 세상 나라의 이방인 (ἔθνος)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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